조회 : 6,247

솔직한 아부지발견하다


BY 2010-01-28


솔직하게 기억을 자꾸 거슬러 거꾸로 돌려보면
희미하게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너무 어린 유년은 흑백의 사진 한 장으로 인화되어
너무 오래되면 누렇게 탈색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난 기억을 재생하려고 했었다.

나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다면
나도 내 생애도 잘 모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사실 작년 가을에 아버지가 묻힌 산소에 나의 딸을 태우고 찾아 갔었다.
딸에겐 외할아버지이고 아버지에겐 손녀딸이다.
원거리 여행임에도 심한 길치에 네비도 없이 찾아가는 무모함에 주춤하다가
괜히 자석에 끌리듯이 찾아 갔지만,
결국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헤매며 혼자 소리로 그랬다.

"아버지 다음에 또 올께유.."  

요즘은 나의 엄마가 나를 찾는다.
아버지의 아내며 부인이며 나에겐 엄마, 어머니이시다.

불면에 시달려 잠을 못드시면 또 하고 늘 하시는 얘기는
내가 일곱살 때 탄광에 도시락을 들고 새벽 일찍 출근하시는 뒷모습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뒷모습이시다.
나도 같이 본 그 상황일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아부지 등을 타고 방안을 뱅뱅 돈 기억만 나는 것이다.

딸이라 아들처럼 살갑거나 애틋하거나
부정에 그렇게 목마르지 않을 거라는 내 생각이 좀 짧았고 모자랐다.
그럼에도 난  줄기차게 아부지를 찾거나 그리워 하거나
하다못해 존경이라도 제대로 한 번 해보았었다면
사실 거짓말 하는 것이다.

이제서야 고백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아들도 아닌 딸로서 어떻게 아버지를 존경하는 방법을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배운 교육 내용에 부모에게 해야 할 효는
무진 외워 대듯이 배운 지식으로 포장된 것 뿐이다.
상식적으로 배운 효는 별로 강한 느낌이 없는 것인가  
나에게만 철저하게 적용되었나 보다.

살아계시지 않은 아버지를 잊었거나 존경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 같은 뜻이 될 수 있다.

벌써 몇 십년이 흐른 세월 앞에
가치관이나 세대관이 전혀 짐작도 못 할 만큼 변경이 된 지금인데.
부동산이니 유산이나 두둑히 남기시든가,
울 엄마 네 남매 혼자 키우시는 고생은 시키지 말든가...
뭐 이런 퉁망스럽게 불만도 없지 않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다보니 나도 부모가 되고 그 심정을 똑같이 겪은 것이다.


아버지, 남자, 남편... 모두 같은 남성의 역할이다.
울 아부지는 아버지 역할도 남자역할도 남편 역할도
성실하게 이행을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존재 할 수 있었다.
현재 남자이기에 가부장제의 원칙에 의거
가족의 생계를 책임완수 하기 위해 산업의 현장에서 전사하듯이
그렇게 살다가 가셨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무진 생각을 많이 했었다.
살아계시지 않은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든 남에게 아무상관이 없을 것이지만.
요즘 시대는 그 직업에 사람의 가치를 가르고 분류가 되고
높낮이 계급으로 대를 잇는 유산이 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지하 몇 백미터에서 울 아부지가 일해요!"
이렇게 말한다고 한들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도 지금은 드물것이며,
들어주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뭐라고 탓을 할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 자신의 잣대는 언제부턴가 정확히 모르지만 궤도수정이 되었다.

광부가 없으면 이 혹독한 겨울에 그 많은 사람들 따듯하게 어떻게 지내나?
이런, 일종의 호기어린 두둑한 뱃심도 자리잡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따로 있다.
나와 같이 어릴적 부모 잃어
힘든 과정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직 생존 하시는 부모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여
미성숙하게 늘 종종 대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돈 못벌어 아내에게 눈치보이고 자식에게 기 못 피는 아버지도 숨어 있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살아 생전에 한 눈 팔듯이 바람만 피다가 가정에 한 번이라도 생활비 주지 못한 아버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처자식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운명적인 생계에 바쁘다보니 자식과 함께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아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희미한 아버지들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여긴 대한민국에서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가시고기처럼 전부 당신의 삶을 투자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도 어느 역에서 사는 노숙자가 된  아버지도 계실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한계를 그어도 처음부터 원인을 캐 본다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그들도 이 대한민국에서 사는  아버지였을 것이다.

돈 못벌어 가정에서 가족에게 제외되고 낙오 된 아버지도 분명히 아버지이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존경해야 할 아버지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한경쟁 시대인 지금에 물질적이고 경제적으로 평생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들은 또 더 많을 것인데.
거기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아빠 아버지들은 사실 가족이 지켜보는 시선과 관점을 변경해야 한다.

 

지금, 현재는 돈만 많이 벌어오고, 가족의 생계를 전부 책임져야 아버지의 대우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180도로 확 변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아버지의 자리는 누구인들 절대로  변질이 불가능한 신성한 위치이며,
그 위치에 1%의 시선변경으로 생각으로 번지는 존경심이 발아되기 시작한다.

아무리 자본이 판치고 돈으로 범벅이 된다고 해도
사람으로 태어나게 이어준 그 은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무한대로 발전을 시켜야 한다.
이것이 진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