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아침부터 햇빛이 거실에 내리쬐며 눈부심을 자랑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쌌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깡그리 모아모아 김밥속을 채워넣었다. 과일도 챙기고 음료수와 마실 물을 챙기니 가방이 불룩하다.
금새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것 같더니만 때아닌 소낙비가 내리쏟는다. 아이들이 탑승해서인지 아우토반에서 비교적 천천히(시속 140k/h) 달리는 것 같다. 독일인 부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예쁜 디즈니 가방을 선물하고, 그 안에 선물상자처럼 여러 가지 과자와 장난감을 가득 채워주셨다. ▲ 비텐베르그 도시의 거리. 고즈넉하고 아담한 작은 도시이다.
비텐베르그에 도착해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교회와 그 안에 잠들어있는 루터의 무덤,그리고 그와 사랑하는 가족이 살았던 집을 관광했다. 여고시절, 세계사 시간에 숱하게 들어왔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그의 유물들을 직접 보며 복습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 원래는 수도원이었으나, 루터의 가족이 살게 된 집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위대한 인물 뒤에 자상하고 강한 어머니가 있고, 성공한 남자 뒤에 평범하지 않은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세계사 속에서 ‘여성’의 중요성과 역할은 아무래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그중 한 인물을 거론하자면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를 들 수 있다. 루터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을 살펴보면서 그 이면에 숨어있는 그의 아내가 뿌린 노력과 헌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또한 루터보다는 그의 아내 카타리나에 관심이 갔다. 자그마한 키에 야무져 보이는 카타리나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비록 그녀와 동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한 남편의 지어미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공감대가 느껴져서일까.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였을 지하실 창고와 거실들을 둘러보았다. ▲ 루터와 카타리나의 초상화(루카스 크라나흐 작) 남편 루터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그의 아내의 견고한 성품과 가정생활에 성실했던 현숙함을 빼놓을 수 없다. 루터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의 부인이 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는 원래 수녀였다.
루터가 구원은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외쳤을 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곳은 수녀원이다. 천주교는 인간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가르쳤고 중세 때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주장은 수녀들에게 더 이상 수녀원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녀원을 탈출했고 적당한 배필을 찾아 결혼하게 되었다.
루터는 실제로 많은 수녀들을 자기 동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결혼을 꿈꾸지 않았다. 루터가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구교의 박해를 받아 언제든지 죽음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루터에게 결혼함으로써 천주교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루터가 결혼한 것은 종교개혁을 시작한 후 8년이 지난 1525년 6월이었다. 당시 루터의 나이 42세, 카타리나는 26세였다고 한다. 나이 차이가 많아 그전엔 카타리나를 다른 남성에게 소개하곤 했다는데, 번번이 잘 안되었다고 하니 제 짝은 따로 있긴 있나 보다.
이날 결혼식에는 비텐베르그의 많은 시민들이 축복해주었고, 지금도 루터의 결혼기념일이 되면 온 도시가 축제분위기가 되고 결혼식을 재현한다고 하니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루터와 카타리나가 부럽긴 부럽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남편에게 종교개혁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현숙한 카타리나가 될 자신도 없으니...
루터는 교황도 의식하진 않았지만 부인에겐 각별했다고 한다. 결혼 초기에 루터는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라는 뜻의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그만큼 루터가 아내에게 애정을 가졌다는 뜻도 되겠지만, 카타리나의 됨됨이가 변함없고 남편에게 더욱 성실했음을 엿볼 수 있다.
루터는 아마도 한국적인 남성이었나 보다. 가정적이기 보다는 외부활동에 치중했다. 그래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전적으로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결혼 후 10여년간 루터 부부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당시 대학교수였던 루터의 봉급도 낮았고, 자신의 자녀 6명과 많은 조카들, 병으로 죽은 친구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다고 한다.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진 저택엔 카타리나가 사용한 지하실이 있다. 이 지하실 안에는 카타리나의 일상을 알 수 있는 작은 모형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500년 전에 사용했던 소쿠리와 쇠로 만들어진 솥들이 걸려있었다.
함께 동반한 독일인 남자의 아내가 그 솥을 가리키며 ‘질이 좋은 물건’이라고 말한다. ▲ 많은 방문객으로 식사시간엔 이렇듯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왼편에 아이들 모형이 있다.
미니어처 모형과 설명을 보면 루터 집안의 식탁은 여럿이 모여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학생 방문객과 동료교수들로 식탁은 언제나 붐볐고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단순히 식사시중만 드는 주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신학적인 대화에도 적극 참여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루터는 그의 아내에게 “당신은 로마교황청의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루터는 몸이 약했는데 항상 카타리나의 염려와 보호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따뜻하고 배려깊은 성품을 알아서일까. 그는 평생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다. 그의 글에서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했다지 않는가.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카타리나의 노력이 지대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순 있지만, 아무튼 남편의 변함없는 사랑의 대상자인 카타리나의 인생도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몸집은 작지만 진실한 가치 안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여인, 카타리나. 어쩌면 그녀는 남편을 종교개혁의 선봉자로, 세계사의 한 페이지의 위대한 인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안에 ‘카타리나’라는 작은 여인이 자리잡혔다. 평범한 일상을 탈출하는 데 급급한 소극적 페미니스트를 부르짖기보다는 내가 처한 일상 속에서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적극적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알게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말씨, 솜씨, 맵씨가 아름다운 여성, 카타리나... 앞으로 당신은 나의 경쟁자야!!!!
박경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