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허위 선생(1854.4.1~1908.9.27) 의병을 이끌고 항일전을 지휘한 충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허위 선생 평(評)- 허위 선생의 집안은 독립운동사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문인데 병으로 죽은 둘째 형을 제외하고 첫째 형 허훈선생은 대학자이자 의병운동가였으며, 셋째 형 허겸선생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였습니다. 또한 선생 가문의 의병활동으로 인해 가족 들이 남한, 북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는 점은 선생과 선생가족의 삶 자체가 당시 우리 민족의 고통을 대변해 주는 듯 합니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선언하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줄지어 일어났는데 선생또한 이 시기에 고향 친구들과 결의하였는데 1896년 3월 26일 선생의 고향인 김천지역에서 수백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의병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친구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선생은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의병부대의 이름은 '김산의병' 이라고 일컬었죠. 선비는 선비인가봅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처음 부대를 만들고 김산과 성주 두 곳에 진을 쳐놓고 전투를 벌였었는데 의병부대를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자 바로 부대를 해산해버렸습니다. 이 후 선생은 자신이 필요로할 때가 있을 것이다는 믿음과 고종황제의 밀지를 기억하며 성균관 박사를 거쳐 평리원 서리재판장 (오늘날 대법원장 서리)에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우리나라와 강제로 맺으며 한국의 군사적 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으며 전국의 황무지를 개척할수있는 권한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국내에 벌어지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전 국민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알아야한다며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전 국민이 의병으로 나와 하나가되어 싸우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래는 배일통문 원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시 선생은 정부관료였으며, 정부 관료 중 일제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행동이였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풀려납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의 조국과 민족을 향한 충의와 애국이 많이도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일제는 아무 이유없이 최익현, 김학진 선생과 함께 허위선생을 체포하며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받게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협박에 되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며 반박하였고 일제는 최익현, 김학진 선생을 석방한 뒤 4개월이나 허위 선생을 더 구금시킨 후 강제로 귀향을 보내버렸습니다. 고향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된 선생에게 들려오는 통탄할 소식. 1905년 을사5적의 노력으로 추진된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이 소식은 선생에게 '드디어 때가 되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자' 라고 들렸는지도 모릅니다. 선생은 곧 바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유인석, 곽종석, 이학균 의병장들을 만나며 의병부대 창설 준비를 하였습니다. 1907년 9월 연천, 적성, 철원 지역에서 선생은 의병을 일으켰고 이인영 선생과 함께 연합의병부대를 만들어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 후 이 연합부대는 전국의병연합조직인 13도창의군이 되었습니다. 13도 창의군의 규모는 총 48개 의병부대가 통합되었으며 의병수 는 1만명에 해당했습니다. 선생이 직접 거느린 의병수는 2천명이나 되었으니 그 규모나 사기가 어떗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서울진공작전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고 최고 지휘부가 단결이 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 이후 각 의병부대는 다시 본연의 부대단위로 나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선생의 의병부대는 임진강과 한탄강 주변을 무대로 항일전을 벌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영향력있는 의병장들과의 추가 연합작전을 성사시키려던 도중 선생의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는데 일본군 헌병사령관이 직접 선생을 심문하고 고문하였습니다. 선생은 일본 헌병사령관에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일제의 한국침략에 대해 오히려 호통을 쳤다 하니 선생의 정신과 기백은 의병장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진정한 의병정신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08년 55세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습니다. 다음은 선생이 사형집행 직전의 기록 원문입니다.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