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이 시작되어 좋은 날들이 비 오는 날보다 많아 사람들 표정이 좋다.
그래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하는 하늘이지만 적응이 되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다.
여름 옷 위에 겨울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는다.
더워서 땀이 흐르는 날은 매우 드물다.
태어나서 가장 많은 꽃과 식물을 심은 5월이었는데 그 중 서른 포기/그루 정도는 토끼들에게 당했다.
토끼는 어린 라벤더를 특히 좋아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무들의 순도 좋아하고, 열무순도 좋아하고,
루핀도 좋아하고 기억도 안 나는 어린 꽃들의 잎도 좋아한다.
토끼풀(클로버)은 그저 입가심 정도로 먹는 것이었다.
보기 싫은 망을 치는 것도 싫고 해로운 약을 치는 것도 싫으니 그냥 두다가
(그래, 먹어라. 자연과 공존해야지 하며) 2년을 키운 큰 라벤더까지 먹기 시작한 걸 보고
속이 상해 들짐승들(토끼, 사슴, 새)이 싫어한다는 유기농 방지제 만드는 법을 알아봤더니
한국 음식 재료랑 너무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영상 속의 미국인은 한국 고춧가루를 신기한 물건인 것처럼 소개하더니 봉투를 열고는
온만상을 찌푸리며 이 가루를 마시거나 피부에 비비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ㅎㅎㅎ
남아있던 고추가루에 썬 양파랑 마늘을 넣고 푹 끓인 다음 그 물을 따라 분사하는 것이었는데
내 코엔 한국 음식향이라 우스웠다. 토끼는 매운 맛이나 향을 싫어한다니 그렇다지만
향기로운 라벤더에 마늘 냄새를 더하는 것이라 아.......... 싶었다.
그리고 식물들은 이 자극적인 물에 깜짝 놀라 죽지 않나 걱정도 되었다.
효과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어제 뿌렸으니까.
매일 저녁 우리집 마당에 등장하는 토끼 가족의 모습은 참 귀엽고 아름다웠는데
농사나 원예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겐 정말 싫은 존재가 맞겠다 싶었다.
하루 종일 허리 아프게 일한 것들이 채 자라기도 전에 그들의 별미로 사라진다. ㅎㅎㅎ
세 살 3개월에 접어든 우리딸은 정말 많이 자랐다 싶을 정도로 컸다.
내가 생각하던 세 살은 훨씬 작고 어렸는데 직접 키워보니 한 달, 몇 달 사이의 변화를 체감한다.
어느 날 불쑥 "I don't like 엄마" 하길래 완전 충격받은 표정과 소리를 냈더니
완전 개구진 표정으로 "I LOVE 엄마!!!" 하며 어른들(아빠에게도 그런 짓을...)을 갖고 놀았다.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한 건 왜일까... 우리 부부는 서로를 탓하고 있다.
좋은 기회가 되어 보게 된 한국 전통 무용 공연을 아기들이 뭘 보겠나 싶기도 했지만
벌써 나와 함께 한 살도 되기 전부터 영화관을 들락거렸고, 정말 시끄럽고 이상하다 싶은 영화 외엔
다 보고 나왔으니까, 스페인에서 한 시간의 플라멩코 공연도 다 본 아이니까 조금 기대하기도 했다.
이 꼬맹이가 뭘 느낄까... 친구들 따라 장난도 치고 공연은 보다 말다 하는 것 같더니
집에 와서 색칠하던 흰 종이를 들고 빙빙 돌았다.
무얼 하나 의아해 했더니 손에 긴 흰 천을 끼우고 춤을 추던 한국 전통 무용가의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너무 귀엽고 신기해서 박수를 쳤는데 그 종이를 찢더니 둘로 만들어 양 손에 들었다.
양 손에 들고 빙빙 도는 세 살 딸의 모습에 놀랐다.
정말 무섭게 흡수하는구나...
나를 닮았으면 그림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겠지 싶긴 했는데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는 건 싫어서
딸이 원할 때 도구를 꺼내준다. 근데 어느새 자라서 자기 혼자 수채화 물감통을 들고 와 물을 떠 달라 하고
정말 놀이처럼 색을 칠하고, 나 몰래 내 오피스로 들어가 키보드를 켜고 뚱땅거리며 노래하는 흉내를
내는데 너무 웃긴다. 반짝 반짝 작은 별을 락처럼 불렀던 더 어렸던 아이 모습을 기억하는데 요즘은
아무 음이나 섞어 부른다. 맞지도 않는 비트 버튼까지 누르며...
마당에 나가 게이트 앞에 서서 완전 진지한 표정으로 나~~~ 놔~~~ 나나~~~ 하며
창작곡을 부르는데 웃음이 나 혼났다. 박수를 치니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I love singing! 하며 팔짝 뛰었다.
이런 행동들이 시킨 적이 없는데 하는 것들이라 매우 신기하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미술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한국 나이로 여섯 살 정도,
그러니까 미술 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을 시작한 무렵이었겠다.
(둘 다 오래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ㅎㅎ)
요즘 아이들은 무엇이든 몇 년씩 빨리 노출된다.
나랑만 지내던 한 살 때는 더 많은 한국어를 하고 한국 노래를 했는데
세 살이 되자 거의 영어로 대답하는 딸이다.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놀이방에 가기 시작하면서 사회성을 배우고 자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 외의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자연스레 생각해 한국어로 하던 노래도 영어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내 말을 알아들어도 영어로 답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내가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듯이 딸에겐 한국어를 외국어로 가르쳐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또 다른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글루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면서 여러 좋은 인연들을 만났는데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내 블로그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경우는 몇 번 정도였다.
아일랜드에서 처음으로 10년 가까이의 삶이 담긴 블로그를 읽어주셨다는 분을 만나
매우 쑥스럽고 감사하고 그랬다.
하는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고립된 생활을 오래 이어와서 성격이 변한 부분도 있고
나이가 들어 예전에 하던 짓들을 덜 하게 되었지만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나오는 얼굴과 행동이 있다.
이젠 딸을 위해서라도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고 둥글게 지내야 한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