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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션] 역사적 근거.


BY 사교계여우 2021-04-11

  최근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별로 좋지 못한 상태이다. 2018년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각각 1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데 대해 일본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난 사안이라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생떼를 쓰고 있어 양국 간 국민감정이 극히 안 좋은 상황이다. 급기야 일본은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 핵심소재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및 제조기술 이전을 기존의 포괄 수출허가에서 개별 수출허가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이 같은 조치들에 대해 WTO 제소와 함께 GISOMIA를 검토하기로 했고국민들은 일본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였다이런 충돌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지만 사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전 세계의 나라들은 거의 모두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라 할 수 있다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오늘날의 지형을 갖춘 것은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지질학에서 말하는 제간빙기에 접어들자 기온이 상승하여 수면이 높아져 대한해협과 일본 북단의 소야해협 및 쓰루가해협 등이 생겨 일본은 아시아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해역으로 분리되자 양지역은 각기 다른 문화가 형성되었다한국의 즐문토기 문화와 일본의 조몬 토기 문화가 그것이다
   기원전 3세기경이 되면 한반도남부로부터 농경문화가 일본열도에 전래된다농경문화는 단지 문화의 전파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파종에서부터 추수에 이르기까지의 농경기술과 농지의 개발관개시설의 조영 나아가 사계절의 변화를 숙지하고 있는 인간집단의 이주이다농경문화의 전래는 재래의 일본열도에 조몬 문화에 대신하는 야요이(彌生문화를 탄생시켰다이 시기 한반도남부는 삼한시대로 마한 54진한, 12변한 12국이 국을 형성하고 있었고북방에서는 부여고구려동예옥저가 출현하였다일본열도에서도 북큐슈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각지에 농업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국이 동시적으로 나타났다『한서』지리지에 보이는 낙랑해중의 왜인 100여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그것을 말해준다
   이후 2세기중엽이 되면 통합의 기운이 높아져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을 중심으로 한 30여국이 연맹왕국을 형성하게 된다. 4세기 이후가 되면 한일 양 지역의 지역적 통합은 더욱 활발해져 지역적 맹주국이 등장하게 된다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제국이 각각 지역적 기반을 갖고 주변의 소국을 통합하여 고대국가형성을 지향하고 있었다일본열도에서는 북큐슈에 대신하여 기내(畿內)의 대화정권이 태동하면서 일본열도의 유력국으로 등장하였다이 시기 한반도 삼국은 영토적 팽창과정에서 전쟁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상호간의 세력균형은 유지하였다.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은 이러한 세력균형을 일시에 .붕괴시켰다당시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다
   이에 백제는 397년 아신 왕자 전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제국과도 연합하여 고구려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 신라와 대항하였다그러나 고구려는 400년 경자년에 보기5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국을 격퇴하고 이를 기회를 한반도남부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확립하였다이후 백제는 왜와 합동으로 수군을 이용하여 대방계 방면을 공격했으나 참패로 끝나고 5세기대 고구려 우위의 국제정세가 전개되었다고구려는 4세기후반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사망하는 등 일시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앞 시대에 입은 보복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가하여 항복을 받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시켰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 결과 고구려 우위적 국제질서가 확립되었고고구려 중심적 중화사상천하관념이 생기게 된다고구려의 남정이 가져온 파장은 일본열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틀림없다전란에 의해 금관국을 비롯하여 제지역의 가야인들은 왜지로 이주망명했을 것이다근년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산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의 계보가 가야의 도질토기에 있으며 북큐슈에서 생산이 개시이후 긴키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으로서 광개토왕의 남하에 동반하여 난을 피해서 가야로 부터 북구주로 이주해 온 기술자에 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가야인들의 왜지로의 이주는 신기술신지식의 전파이며 일본고대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6세기에 들어가면 가야제국은 신라백제에 의해 점차 소멸되어 간다이때 기내의 왜 왕권은 백제를 도와 병력을 보낸다이 사건은 왜가 백제를 도와 가야를 공격한 사건인데이때 북부가야의 대수장이었던 대가야는 왜와 군사적 대치상태를 맞이한다가야제국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왜가 무슨 이유로 가야제국에 적대행위를 했을까이것은 일본열도의 정치세력과 가야제국간의 다원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외교의 주체가 한 세력에 의해 독점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 간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섬진강 방면의 가야제국은 주도 북큐슈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세력과 친연관계를 유지했고낙동강하류역의 가야제국은 기내의 대화정권과 교류했던 결과로 보인다.
   한반도 삼국 중에서 왜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국은 백제였다백제와 왜국은 국교의 성립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마치 형제국과 같이 친연관계를 맺어 왔다. 640년대에 들어가면 한반도 삼국의 군사적 대립은 격화되고 동아시아제국을 상대로 한 군사외교도 치열해진다이 시기 백제의 최대의 적은 신라였다신라는 당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13만의 당군과 5만의 신라군이 합세한 군사력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만다백제국의 성립이후 멸망에 이르기 까지 양국은 지배층간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해 나간다이것은 일시적이고 단순한 동맹관계가 아니라 장기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친연관계였다고대 동아시아제국 중에서 백제와 왜국만큼 변함없는 나라는 발견하기 어렵다
   645년 왜 왕권은 조정의 권력을 전횡한 소가씨를 타도하고 대화개신을 실현하여 왕족중심의 개신정권을 성립시켰다. 7세기후반 신라의 대당관계는 당 세력의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등 적대적 관계였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일본 역시 7세기말까지 당과의 교류를 단절한 채 신라와의 교류에만 주력하였다양국은 당을 의식한 공존의 관계로 비교적 평화적인 교류를 전개하였다. 8세기에 들어가면 일본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천황제 율령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율령 법전에 신라를 일본의 번국조공국으로 간주하는 조문을 삽입시켰다신라보다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쟁 심리에서 나온 것이지만현실의 외교의 장에서도 이를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신라의 반응은 일본의 요구를 거의 무시하며신라에 온 일본사절에 대해 무례함을 지적하면서 접견을 불허하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풍부한 생산력과 우수한 수공업 기술을 바탕으로 대일교역에 주력하였다그러나 779년 이후가 되면 양국의 공적 교류는 종말을 맞이한다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대조영이 건국하였다발해와 일본의 공식 사절을 보면 발해에서 일본에 34차례 사절을 파견하였고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사절은 13차례나 되었다그러나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는 8세기 후반에 이르면 발해의 대외적 자신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해 일본과 몇 가지 외교적 갈등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후 고려는 후삼국통일로 동해와 남해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동해는 고려의 내해(內海)가 되었다고려의 높아진 위상으로 인해 일본과 여진 모두는 동해를 고려가 통할하는 바다로 인식하였다고려시기 동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한 일본과의 영토분쟁은 없었다따라서 동해를 따라 출몰한 여진 해적인 도이적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일본이 국력을 다해 도이적을 몰아내면서 이를 추격할 때도 일본정부는 군대는 물론 민간인들은 고려의 영역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령했다. 710년 나라 지방에 헤이조(平城)가 완성되어 처음으로 항구적인 수도를 세워졌는데 이 시대는 비록 75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귀족 문화가 발달했고역사편찬이 이루어졌으며또한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다.
    '일본'이란 국호가 정식으로 사용되었고천황의 세력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중국의 후원 하에 나라는 문화적으로 융성했다침체되어가는 경제와 군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794년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겨 헤이안(平安)시대가 시작되었다이 새로운 수도 역시 중국을 모방해 세워졌다헤이안(平安)시대는 궁정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귀족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던 시대이기도 하다한문을 간소화하여 만든 일본 문자 '가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이때부터 여성들은 12겹으로 된 기모노를 입었는데헤이안 시대 말 수도와 궁정이 예술과 향락추구에 여념이 없을 사이 천황의 권위는 약화되고 지방에서는 호전적인 사무라이가 힘을 드러내게 되었다.
   12세기 중엽 일본에서도 고려와 같이 귀족시대인 평안(平安시대가 끝나고 무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는데 이 무인들을 제압하고 무인정권을 세운 평청성은 잔인한 공포정치를 통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그러나 강대한 지방 무사들의 존재로 인하여 평씨 정권의 지배는 단기간에 끝난다경쟁자인 원뢰조는 평씨 정권을 타도하고 집권하여 평씨 정권의 단점을 개선해 지방마저 막부체제로 편입시켜 체제의 기틀을 다지고 조정과 막부두 정권이 양립하게 되었다일본 700여 년의 무인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확립된 것이 바로 이 때부터이다사무라이는 섬기는 사람을 의미한다명예를 보존하는 방법으로써 의식적으로 자살하는 관습인 할복자살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다
   이 시대에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일어난 몽고 세력이 큐슈의 해안을 공격하였는데가마쿠라 막부의 지배 하의 사무라이들이 동원되었다그러나 몽고의 침략선을 두 번씩이나 난파시킨 살인적인 태풍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태풍을 가미가제(信風즉 신의바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이 말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가 창설되면서 다시 유행하였다노부나가는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의 시종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그의 사령관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했다그는 중앙집권화 된 봉건사회의 기초를 세웠다그는 중국을 정벌한다는 핑계로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강력한 후원 세력을 얻어 패권의 꿈을 이루었다그가 통치하던 25년간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막부 정치는 에도(현재의 도쿄)에 자리 잡았는데 사(사무라이), (농부), (기능공), (상인)의 4계를 엄격히 조절하는 강력한 행정 제도를 실시하였다. 1853년 미국 선박의 선장인 코모도르 페리는 우라가만에 닻을 내리고 일본에 교역항을 열 것을 요구했다막부 정권은 재정상의 궁핍과 약한 군사력 때문에 외국인들을 격퇴할 수 없었으므로 이를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불평등 조약에 조인했다결국 권좌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가 다른 사무라이의 반란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은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3년 미·일 화친조약과 1858년 영국러시아네델란드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1866년 막부 세력이 패배하고 다음 해에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제도가 철폐되고 문벌이 아니라 능력 본위로 구성되는 근대적 정부 기구가 세워졌다수도는 에도로 옮겨져 도쿄로 이름 붙여졌고 메이지(明治)천황의 통치로 군주 정치가 복구되었다항구들은 열강들에게 열려졌으며 일본 전역에서 유럽화 경향이 일어났다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이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통일 국가를 수립했고경제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를 성립시켰다정치적으로는 입헌 정치가 시작되었고 사회문화적으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실마리를 얻어 해외 팽창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 결과 대만을, 1905년 러일 전쟁 결과 사할린 남부 절반을 점령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그리고 1910년에 한국을 합병했다메이지 천황은 1912년에 사망했고군부는 계속해서 군대 팽창 정치를 밀고 나갔고일본 내에서는 잠시나마 의회 정치와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났다이 시기의 한국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기본적 특징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직접지배의 원칙을 채택하였으나프랑스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른바 동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한 데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한국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그 결과한국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이 한국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오늘날 한국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쇼와(昭和시대(1926-1989)는 히로히토(裕仁일왕이 지배하는 시대였는데극단적인 군국주의자들은 아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더 깊은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2년 만주가 일본의 군사 보호국이 되자 유럽이 비난하므로 일본은 다음 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 특히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 터진 1937년을 기점으로 군부는 점차 정부를 장악해 갔다마침내 1941년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 들었다그러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연합군에게 항복한 일본은 경제 규모가 메이지 초기 시대의 수준으로 줄어들었고다음 해 신년에 천황은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는 라디오 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다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부터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시작한 일본은 다른 나라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일본 경제의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을 유치한 이후 산업의 발전은 탄력을 붙여 서양에서 모방한 여러 제조업과 첨단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였다한편 우리나라는 해방된 후 남북이 분단되고 6.25사변을 겪어야 했으며박정희의 5.16 쿠데타전두환의 5.18 광주 학살 등 정치군인들에게 유린되기도 했지만 지금 반만년 한민족 역사 이래 가장 부유하고 코로나 사태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막강한 나라로 발전해왔다.
  물론 이런 이면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른 일본의 재정 지원과 기술지원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터득한 근대화 정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그렇다고 해서 일제 강점을 미화하거나 강제징용위안부 같은 것을 부인하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생떼를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더욱이 지금 아베 정부는 군국주의 부활을 원천봉쇄한 평화헌법을 고쳐 언제든지 남의 나라를 침탈하려는 야욕을 극우주의자들과 함께 키우고 있으며그 첫 번째 목표가 독도 침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일본을 경계하고 자주국방 정책을 강화하는 것은 매우 절실하다현재 그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고등학교 교과서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