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단연 ‘주방’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서울에 있을 땐 그닥 부엌과 친하진 않았었다. 이래저래 바깥일이 많다보니 자연 집에 돌아와도 힘들면 외식을 나가기 일쑤였고, 혀 짧은 소리까지 동원해 남편에게 주방일을 맡기곤 했었다.베를린에 와서는 외식을 나간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귀찮은 것 보다는 무엇보다 생활비 지출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부식비가 그리 비싸지 않은 탓에 직접 손으로 만든 음식이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셈이다. 서울에서는 삼겹살 먹으러 우리집 4인 가족이 출동하면 3만원 안에서 해결되었고 그다지 큰 소비를 했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그러나 여기는 10유로(환율 1유로에 1200원)를 넘어서면 왠지 비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외식을 해서 몇 십 유로가 나가면 그날은 후회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이곳에서는 완전 부엌떼기의 위치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주로 사용하는 가족커피잔ㅡ 녹차잔 세트
부엌살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예쁘고 고급스런 그릇들에 대한 애착과 주방생활의 불편함에 대한 즉각적 반응이었다. 덕분에 내 찬장에는 그릇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가끔씩 벼룩시장을 가게 되면 쓸만한 엔티크 그릇들이 선보이곤 한다. 가장 관심가는 것은 단연코 그릇이다. 정통 유럽식 고급그릇들이 유혹하는 독일의 주방이 즐거운 이유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도 존재한다. 나같은 한국주부들에게만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칼크가 섞인 물이 나에겐 정말 곤욕스럽다. 독일 뿐 아니라 다른 이웃 유럽나라에서 살림을 시작하다 보면 가장 먼저 준비하게 되는 것이 일명 브리타 정수기이다. 한국에서 살 때 이온수기까지 설치해가며 깨끗한 물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나였기에 이곳에 정착한 후 가장 먼저 물을 걱정했었다. 그래도 이곳 국민들은 의외로 느긋한지 정수기 시스템이 보편화되지 않고, 간 크게도 날것으로 수돗물을 먹기도 한단다. 먼저 이 곳의 물의 질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심각하게 칼크가 하얗게 깔리는 물을 먹고 어찌 몸에 지장이 없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들은 단지 담석증 환자가 좀 많다거나, 노인이 되면 다리 뼈가 기형적으로 두껍게 변해서 코끼리 다리가 된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어느 날인가는 부엌 씽그대의 물을 그릇에 받아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들여다 보니 뿌연 가루가 밑바닥에 엄청나게 깔려있었다. 하여튼 주전자만한 조그만 정수기로 쌀을 씻어야 하고. 김치도 담궈야 하고, 상추도 씻어야 하고...목욕을 해도 피부가 까칠하고, 세면기 주위는 뿌옇고, 목욕한 후에는 몸에 오일이나 로션 등을 듬뿍 바르며 신경써줘야 하는, 물에 대한 불편함은 이 땅에 사는 한 계속될지도 모른다. 주방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이 이러하니 요리에 대한 즐거움이 줄어들만 한데, 그래도 불편함을 만회할 만한 구석들이 비교적 많은 것이 이곳 생활이기도 하다. 이곳생활의 필수품, 정수기 얼마 전, 독일에서 보편화된 중저가 인테리어 매장인 ‘IKEA'라는 할인매장에 갔었다. 단연 주방인테리어와 잡동사니 조리기구들에 필이 꽂혔다. 그중 나의 큐피트 화살을 받은 녀석들이 있으니, 사과 쪼개는 기구와 바나나 자르는 기구였다. 저렴하고 실생활에 가장 필요한 소도구라 주저할 것 없이 장바구니에 쑤셔넣었다. 독일에선 페인트나 거실인테리어 등의 물품들이 세분화되어 스스로 제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주방 또한 무척 섬세한 도구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한국처럼 눈에 쏙 들어오는 예쁜 디자인 제품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기능성에서만은 단연 우수한 듯하다. 그 작고 앙증맞은 녀석들이 요즘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손님접대에서 일일이 사과를 깎지 않아도 한 번에 쪼개주고, 특히 아침에 빵과 함께 과일로 식사를 준비할 때 간단하게 내 일손을 덜어준다. 오늘도 주방의 한 켠에서 김치를 담그고, 된장국을 끓이고 고슬고슬한 흰쌀밥을 짓고 있는 나. 내 식생활은 그야말로 한국의 것인데, 이곳의 몇백 년부터 이어온 녹슨 수레바퀴 톱니에 날 안착시키는 것 같은 이질감... 조막만한 정수기로 쫄졸쫄 물이 채워지면 배추를 씻고 다시 물이 차길 기다리며 나에게 되뇌인다. 성질 급한 나의 인내심을 훈련하는 중이라고...불편한 것은 불편한 대로 내버려두고, 편리한 것은 한없이 가속화되는 이곳의 문화를 체험하라고... 오늘도 나는 투덜이의 허물을 벗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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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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