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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장이 빚문서가 되었어요


BY 2010-03-04


다섯 친구의 깨진 약속

학사모를 쓴 친구 다섯이 웃고 있었다. 지난해 8월 서울의 명문 사립대 여름 졸업식장. “우리 다음에 볼 때는 백조(젊은 여성 실업자를 뜻하는 은어)로 만나지 말자.” 미술전공한 04학번 여대생들은 이런 약속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입학한 지 5년 6개월 만이었다. 졸업을 1년 반이나 미룬 것은 ‘스펙’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학점 4.0 이상, 토익 900점 이상, 어학연수, 경영학 복수전공…. 제품을 업그레이드하듯 자신의 ‘사양(仕樣)’을 발전시켜왔지만 졸업식까지 5명 모두 취직하지 못했다.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통해 생기발랄함이 조명되고 있는 G세대(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태어난 글로벌세대). 그들의 형뻘인 1980년대 초반 출생자들은 학생 신분으로 1997년과 2008년 두 차례 경제위기를 겪으며 우울한 이름의 시사용어를 얻었다. 중학생 때 외환위기는 부모의 직업을, 대학생 때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신의 취업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트라우마 세대’, 구직난에 인턴 생활로 내몰린 ‘인턴세대’, 20대 비정규직 평균임금을 뜻하는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다섯 친구의 약속은 어떻게 됐을까.

“시집 갈 때까진 일할 수 있겠네”

다섯 중 민지영(가명·27)씨는 졸업 후 정부출연기관에서 디자이너 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월급 110만원. ‘88만원’보다는 많았다. 넉 달 뒤 다른 기관의 디자이너 보조역으로 옮기며 ‘알바’ 꼬리표를 뗐다. 파견직에 월급 200만원. 그런데 매달 손에 쥐는 돈은 120만원이다. 근로자 파견업체에서 상당액을 떼 가고 세금 등을 제하니 정작 수입은 단 10만원 늘었을 뿐이다.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4년이다. 민씨 직장은 파견 근로자를 2년 만에 서류상 해고한 뒤 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해 2년을 더 근무시키고는 완전히 해고한다. 파견이나 계약직 근로자는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토록 한 파견근로자보호법을 피하기 위해서다. “시집 갈 때까진 일할 수 있겠네.” 민씨를 면접한 채용 담당자의 말은 그의 꼬여버린 출발을 대변했다.

-파견근로를 택한 이유가 뭐죠?

“아, 나도 이제 직함이 생기겠구나, 일단 알바보다는 낫겠구나 했죠. 월급도 오를 것 같았고….”

-좀 더 기다려서 정규직을 찾아볼 수 없었나요?

“빚이 많아요. 학자금 대출로 저와 제 동생 빚만 1400만원이 넘어요. 일단 일을 시작하니까 다른 길 찾기가 쉽지 않네요.”

민씨는 대학 1학년 첫 학기 200만원 등 5년 반 동안 학자금 400여만원을 대출 받았다. 학기마다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 그나마 적은 편이라고 한다. Y대 간호학과 3학년인 동생은 비싼 실습비 때문에 대출금이 벌써 1000만원을 넘어섰다.

민씨는 “대학 장학금이 많이 줄어서 등록금에 턱없이 모자라 닥치는 대로 돈 벌러 다녔다”고 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동대문시장 포목점의 시급 3500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고, 주말마다 2만원가량 교통비를 주는 학술 좌담회 방청객도 해봤다.

꼬인 인생, 그 발단은 외환위기였다. 민씨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은퇴 후 벌인 사업은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해 그 다음해 실패로 끝났다. 어머니가 하던 책 대여점도 불황을 견디지 못해 처분해야 했다. 결국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다.

민씨가 대학에 입학하자 이웃들이 “딸이 좋은 대학 가서 좋겠다”고 축하할 때 아버지는 사채를 끌어다 입학금을 마련한 뒤 군고구마 리어카를 끌었다. 민씨는 “제 주변엔 외환위기 때 집안이 휘청거린 친구가 많아요. 등록금은 각자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 같은 게 있었어요”라고 했다.



“우리가 눈이 높다고요?”

스펙을 갖추려면 돈이 든다. 기본적인 토익시험 한 번에 3만9000원, 말하기와 쓰기 시험이 포함되면 12만5800원의 응시료가 필요하다. 1년 어학연수에 수천만원, 취업 잘되는 학과 복수전공을 위해 1∼2년 대학을 더 다니면 그만큼 등록금이 추가된다.

지난달 졸업한 한양대 공대 01학번 박태진(가명·28)씨는 세 차례 ‘취업연장전(취업을 못해 졸업을 늦추는 것)’을 치렀다. 3년간 졸업을 미루며 스펙을 쌓았지만 끝내 ‘취업준비생’으로 졸업했다. 그동안 받은 학자금 대출은 1500만원. 더 이상 빚지는 게 두려워 대학원 진학도 포기했다.

지난달 26일 한양대 교정에서 만난 그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스펙을 들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토익은 900점이 넘어요. 복수전공도 했고. 1학년 때 소홀했던 탓에 학점은 4.0에 조금 못 미쳐요. 군대 갖다 와서 스펙에 매달렸는데 남들도 그만큼은 다 해놨더라고요.”

그가 실패한 것은 취업뿐이 아니었다. ‘취업 스터디 그룹’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요즘은 교내 취업 스터디 그룹에서도 영어에 능통한 해외거주 경력자만 뽑아요. 저는 배낭여행 말곤 외국 경험이 없어서 그런 모임엔 끼지 못했어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도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턴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곳이 거의 없잖아요. 1년간 인턴 하고 나면 다시 출발점에 서는 거죠. 그러면 나이 때문에 신규 취업도 어려워지고. 이러다 일본 프리터(단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사람)처럼 될까봐 겁나요.”

눈높이를 좀 낮추면 어떠냐고 물으니 발끈한다.

“이런 경험 해보신 적 없으시죠? 우리 상황을 경험하지 못한 기성세대가 우리에게 눈이 높다고 하는 건 정말 억울해서…. 예전엔 대학 졸업장이 취업 보증수표였을지 몰라도 지금 제게는 빚 문서일 뿐이에요.”



“취업도 돈이 있어야…”

2008년 8월 동덕여대를 졸업한 03학번 최승희(가명·25)씨는 대학 4년간 중국어에 매달렸다. 경제대국 언어만 마스터하면 취업 경쟁력이 있으리라 믿었다. 여름이면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에서 등산객들에게 과일을 막대에 꽂은 ‘과일스틱’을 팔고, 주말마다 대형마트 판촉행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번 돈을 고스란히 중국 랴오닝성 어학연수에 썼다.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졸업 전후 1년간 입사원서 60여통을 작성했지만 오라는 곳이 없었다. 서류전형은 종종 통과했어도 최종 면접에선 항상 미끄러졌다. 왜일까? 그가 내린 결론은 영어 때문이었다.

“중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은 너무 많더라고요. 영어도 같이 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영어권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살다 오거나, 어려서부터 여러 언어를 배운 애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뒤늦게 제가 돈 벌어 하기엔 사실 불가능하죠. 집에서 도와줬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고요.”

최씨 아버지는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가계가 넉넉하지 못했다.

“저 말고도 동생이 둘 더 있어요. 대학에서 주는 장학금은 많지 않고 정부는 대출만 장려하고, 점점 부자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걸 피부로 느끼겠는데 별 도리가 없었어요. 핑계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느 대학 졸업했나’가 취업을 좌우한 지는 오래됐다. 최씨는 “요즘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고 했다. ‘좋은 스펙 갖추도록 뒷받침할 경제력이 부모에게 있는가.’ 여기에 따라 같은 대학에서도 취업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학생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한다.

최씨는 졸업 1년여 만인 지난달 대형 주류업체에 취직했다. 이제 겨우 첫 월급을 받았을 뿐인데 벌써 청약저축과 적금, 그리고 몇 가지 보험을 들었다. ‘생존’을 위한 준비는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인생

지난 1일 민씨와 친구 4명은 졸업 6개월 만에 서울 대학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민씨는 여전히 파견 근로자였고 3명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오토캐드, 포토샵 등 그래픽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학원이다. 순수미술 전공자들이 비교적 일자리가 많은 시각디자인을 뒤늦게 배우는 것이다.

나머지 1명은 지도교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취업을 포기하고 전공을 살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부럽다”고 했지만 그는 “용돈 정도 받으며 산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날 아무도 ‘백조로 만나지 말자’던 졸업식 약속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6개월을 더 미뤄 지난달 졸업한 동기생 중 취업에 성공한 친구 얘기가 나왔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았고 영어와 일본어에 능숙하다고 했다. 민씨는 “출발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저도 일 열심히 해 자립하면 전공 살려서 그림 그리며 살 거예요”라고 했다.

파견 근로자 민씨가 계약직 근로자를 거쳐 현 직장을 떠나야 하는 4년 뒤면 자립할 돈을 모아 원하던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을까? 아니면 31세란 나이로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미래에는 꽤 많은 물음표가 있어 보였다.

한때 N세대(정보화 세대)라 불렸던 이들은 이제 군색한 88만원 세대가 됐다. 두 번의 경제위기는 이들의 가정을 흔들어놓았다. 기업은 신규채용을 줄였고, 정부는 ‘청년인턴’이란 미봉책을 내놓았다. 경제 양극화는 취업 양극화를, 학부제는 취업 잘되는 학과 문턱을 높였다.

취업을 위해 들어간 대학에서 빚을 졌다. 빚을 갚기 위해 비정규직이란 꼬리표를 감수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규직 취업 기회는 점점 멀어진다. 탈출이 요원한 ‘뫼비우스의 띠’ 위를 돌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이들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사회안전망이 흔들리는 것인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