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
삶은 아름답다. 그것은 들판에 꽃이 있어서가 아니다. 날마다 즐길 수 있는 오락이 있어서도 아니다. 꽃이 있어 조금 더 우리의 눈을 화려하고 부시게 만들지만 꽃만으로는 삶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오락도 마찬가지다. 골프를 즐기고 음악 감상을 하며 영화를 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삶을 아름답게 하기엔 부족하다.
나는 삶을 정말 아름답게 사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꽃도 아니며 골프를 한 번도 친 적이 없고 더욱이 우리가 생각하는 오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난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황홀했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돌아오자 여기 나환자 마을에 이상한 병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 곳의 나환자 부락에서 일곱 명의 혼자들이 죽은 것이다. 불과 이틀 사이에 말이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말라리아라도 발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시기적으로 보아 말라리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나마 아직 우기가 오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벌써 한낮의 기온이 43도에 이르고 보니 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마을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마을에서도 갑자기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인도인 선교사, 나에게 급히 마을을 떠나 있을 것을 종용한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더욱 더 재촉을 하며 자기 차로 첸나이 시내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까지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첸나이로 나왔다. 뒤에 남은 식구들이 밟히는 것을 억지로 눌러가며 첸나이 센츄럴 역 앞 호텔 밀집 구역에 있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를 잡았다. 그러나 그대로 마냥 기다릴 수만 없을 것 같아 바로 어제 또 다른 인도인 선교사에게 연락을 하여 첸나이에 있는 보건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한국인 의사를 만난 것이다. 첫눈에 얼핏 보아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도 나를 첫눈에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광주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인도로 온 서른여덟 살의 젊은 의사. 그의 아내 또한 의사인데 한국에서 돈을 벌어 남편의 해외 봉사활동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내가 사겠다고 하자 오히려 자기가 사야한다면서 중국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한국 사람과 식사를 한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내가 모르고 있는 나병의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 마련한 자리인데 뜻밖에 정말 가슴 뭉클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해에 어머니를 암으로 잃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앙상하게 여읜채 쓸쓸히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문득 우리 아들이 생각났다. 아마 우리 아들에게도 이와 흡사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분위기는 이렇게 슬픈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흐를수록 나의 가슴에 들어박히는 전율들, 갑자기 내가 천국에 와서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티베트 여행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별보다도 그리고 히말라야의 설산들 보다 더 신선하게 온몸을 황홀로 휘감았다.
-저는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어요. 어머니와 그 어떤 약속 같은 것은 없었지만 훗날 병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내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그리고는 전문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바로 자원을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아니어도 충분한 의료 시설과 의사들이 있으니까요. 진정 내가 필요한 곳을 찾아 왔습니다. 물론 아내도 흔쾌히 허락을 했고요. 무엇보다 내 자신이 기쁩니다. 머지않아 아내도 이곳으로 와서 나와 같이 합류할 생각입니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버는 정도라면 굳이 그런 사람을 칭송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병을 고치는 의사라고 해도 자신의 가족들과 자신의 안락을 위해 의료 행위를 한다면 그것을 두고 우리는 거룩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너도 나도 잘나간다는 사람들은 그저 의대를 지망하고 그 후엔 돈 잘 버는 과목으로 개업을 하는 것이 작금의 우리 의학계의 현실이 아닌가?
물론 그들의 선택에 조롱하지 않는다. 개인의 결정과 선택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몫이다.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지당한 선택이다. 다만 그런 선택에 대해 조롱은 하지 않을 뿐, 그렇다고 존경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아서 그것이 부럽다는 말을 할지언정 숭고하다고 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감히 그 젊은 의사에게서 마치 보석을 본 것처럼, 아니 그 어떤 보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싶었다. 나는 작고 예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손을 잡은 채 얼굴만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그 웃음 뒤에 있는 오래전 그의 기억들을 나는 상상 할 수 있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그도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선생님이야 말로 정말 장하십니다. 이 열악한 환경 속으로 찾아 오셔서 일을 하시고 계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특히 나환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의식은 그 어떤 질병이나 환자들보다도 더 꺼리는 것인데 말입니다. 아무 때고 찾아오세요. 전화를 주셔도 좋고요. 그리고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제가 일하고 있는 예방의학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니 얼마든지 도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인도의 실정으로 보아 선생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그렇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환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도 갖고 있지 않거든요. 에이즈와 결핵 말라리아 같은 질병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데 나환자에 대해서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많은 환자들을 다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만 몇 명만이라도 좋은 뜻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뜻이 불꽃처럼 번져서 세상을 밝히고 달굴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여기 인도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해 주십시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제 자식 사랑하는 일도 아름답다. 연인들이 나누는 뜨거운 정렬도 아름답다. 진한 우정과 훈훈한 우애, 그리고 처절하게 슬픈 불륜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아름답다. 차마 표현 할 수 없는 그 함축된 사연들을 안고 눈물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랑들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런 사랑들 보다 더욱 더 아름다운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면부지의 머나먼 타국으로 찾아와 자기네 나라에서도 버리고, 자기네 국민들도 내버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있다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랴? 제 자식 사랑하고 제 식구 감싸는 일이야 짐승들도 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서른여덟 살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혹도 넘기지 않은 어찌 보면 아직도 청년의 티에서 벗어나지도 않은 그는 나이답지 않게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커다란 사랑의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돈을 번다면 얼마나 잘 벌겠는가? 그의 아내마저 의사라고 하니 두 의사가 눈 딱 감고 돈을 벌기로 작정한다면 얼마나 많이 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달랐다. 돈이란 그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이상의 물질은 한낱 낭비요 허세라고까지 잘라 말하는 그 사람......그 사람이 한 달에 받는 돈은 한국 정부에서 지원하는 150만원이 전부다. 그것도 많다며 아프리카 에이즈 예방 기금 후원회로 매월 20만원을 보낸다.
그렇다. 전쟁과 폭력과 우상으로 세상이 난무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리고 홀연히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더럽다고 욕을 한 적도 많았고, 이기와 독선과 무자비로 가득한 쓰레기 같은 세상이라고 세상을 향해 원망하던 시절도 있었다. 차라리 짐승의 세계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한 순간에 씻겨나가고 또 다시 나에게 용기를 주고 힘을 얹혀 주는 것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선생님, 더러운 곳이 있기 때문에 청소부가 필요하고 아픈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아파도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 조금만 빨리 치료만 서둘렀어도 굳이 죽지 않았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지상에는 너무도 많아요.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아프리카 같은 데서는 말라리아로 해마다 수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조금만 손을 잡아 이끌어준다면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여 결국 그가 주저 않도록 만든다면 그것이 바로 죄악이지요. 나 혼자의 작은 힘이지만 내가 있는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저와 같이 열심히 일해 주세요.-
덧) 다음카페에서 한돌님의 글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