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노동하는 섹슈얼리티 3.성노동의 개념-성노동과 젠더의 관계
다자키 히데아키
만약 성노동자를 ‘어떤 종류의 육체적 접촉을 통해 상대방에게 쾌락을 줌으로써 돈을 버는 사람’으로 정의하면, 전업 주부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조반나 프랑카 달라 코스타(Dalla Costa, Giovanna Franca)의 「사랑의 노동(Un Lavoro d\'Amore)」에서는 주부도 기본적으로 노동자이며, 주부가 행하는 섹스도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운동을 구상한다.
.. 성노동이 노동인가에 대해서는 경제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여러 논의가 있는데, 이는 정의(定義)문제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축적에 공헌한 것은 전부 노동이므로 가치 증식을 위한 행위나 가치가 감소하지 않도록 하는 행위도 다 노동으로 본다. 형식적으로 생각하면 성매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 다만, ‘매춘’이 ‘노동’이라는 데에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성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영위여서 돈으로 거래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 성매매에 처음부터 붙어 다니는 각종 차별 의식으로 인해 자신의 일과 성매매 종사자의 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논하고 싶지 않은 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집단으로서 떠오른 \'성매매 종사자\'
.. 성매매를 하는 사람을 포함해 대부분 사람들은, 성매매 하는 사람을 자신과는 다른 인간, 다른 유형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관념이 생겨난 것은 19세기 유럽이었다. 그즈음 노동자 계급은 생활이 어려워서 여성도 밖에서 일하며 생활을 영위했다. 이에 반해 부르주아 계급 여성은 기본적으로 남편의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집 안에 갇힌 존재였다. 노동자 계급 여성은 일자리가 없을 때에는 성매매를 해서 돈을 벌기도 했다.
.. 그런데 19세기에는 공중위생학과 경찰이 결합되어 도시의 군중을 조사해서 민중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병이 문제로 부상한다. 19세기에 성이 문제가 된 것은 거칠게 말하면, 개인의 ‘건강’과 집단의 ‘건강’이 포개지는 지점이 성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행한 ‘인구론’이 제시한 것은, 인구 특히 ‘위험한 집단’의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개인이 ‘건강’해도 사호의 ‘건강’을 해치며, 또 개인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분이 유전과 성병의 형태로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므로, 사회 쪽에서 적절히 개인의 ‘건강’을 조직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성이 권력의 중심적인 조준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병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막고자 성매매 종사자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서, 게다가 개인이 아닌 통계적인 집단으로서 파악하려는 사고방식이 나왔다.
.. 노동자 계급 여성들의 일시적 수입원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졌음에도, 성매매 종사자들을 한 집단으로 상정하고자, 일반적인 노동자 여성과는 다른 유형의 여성이 존재하며 마치 그런 사람들이 성매매를 하는 양,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다른 일을 하는 여성은 전혀 상관없다고 구별하게 되었다. 성매매 외의 직업을 가진 여성은 착실하게 일하고 ‘건강’하며, 성매매를 하는 여성은 육체적 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존재로 보게 되었다.
.. 또한 성매매 종사자의 전업화도 병 관리와 관계된다. 성병을 국가가 잘 관리하려면 어떤 사람이 우연히 성매매를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을 전담하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을 모아 감시하는 쪽이 편하다. 그런 상황에서 공중위생학과 문학, 신문 등에 의해 형성된 표상의 뒤를 좇아 성매매 종사자 집단을 실체화했다.
당시 사교계에 양가집 규수는 나가지 않았다. 집 밖에 있는 여성은 언뜻 보기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상류 부인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층계급 출신자들이었다. 즉 외관과 내면의 분리 불일치가 성매매 종사자들을 따라다니는 표상이었다.
.. 여기에 전제가 된 것은 상층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격차이다. 그 격차를 둘러싸고 줄거리(plot, 음모)가 만들어졌다. 성매매 종사자는 외관적으로만 계급 상승을 이루며, 그 자체도 보이기 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계급 상승을 이룬 여성은 누구인가? 바로 주부이다. 주부는 부르주아와 결혼을 통해 실제로 계급 상승을 이룬 여성을 말한다.
.. 노상(路上)은 여성들이 이동하는 장소였다.(오늘날 ‘구조 조정’의 대상이 된 제3세계 국가들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도시 재개발 등을 이유로 여성이 쫓겨났다. 노상에서 여성이 노동자로서 일하는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노상에 남은 여성은 누구인가? 바로 거리의 여자, 즉 매춘부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일반 여성 노동자와 성매매 종사자는 구별되지 않았는데, 도시의 노상에서 여성 노동자가 쫓겨나는 과정에서, 성매매 종사자만이 밖에 남겨진 것이다.
생식과 쾌락의 분할 이전으로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생식을 담당하는 여성과 쾌락을 담당하는 여성을 구별하게 되었다. (새넌 벨의 저서 “성매매 종사자의 신체를 읽고, 쓰고, 다시 쓴다”에 의하면) 가부장제의 한 특징이 생식과 쾌락의 분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자신의 자손인 아이를 남기는 것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가가 중요하다. 그렇게 남성이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지면, 여성의 성 행동은 아무래도 통제 대상이 된다. 그래서 쾌락의 역할이 생식의 역할과 분리된 것이다.
여성을 ‘본처’와 ‘첩’, 또는 처와 매춘부의 두 가지 범주로 분할하는 것이야말로 가부장제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그에 대한 반대는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은 여성이 되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 터이니, 모든 여성이 ‘매춘부’가 아닌 ‘처’가 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생식을 담당하는 여성과 쾌락을 담당하는 여성이라는 남성 측의 구별을 뛰어넘은 여성의 존재를 어떻게 다시 한 번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 벨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플라톤이다. 가령 「향연(symposion)」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의 신비를 가르친 디오티마(Diotima)는 누구인가? 좀 억지가 있지만, 벨은 헤타이라, 즉 당시의 매춘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혹은 아스파시아(Aspasia)를 생각해도 좋다. 「메네크세노스」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매춘부인 그녀야말로 페리클레스의 변론술 선생이라고 말한다.
즉 민주주의의 기본인 변론술도 매춘부 여성이 가르쳤던 것이다. 철학과 민주주의 기원에 매춘부가 있었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매춘을 하고 철학도 가르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가르쳤던 헤타이라는 원래 신전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성적 쾌락을 주고 자신들도 느끼며, 그뿐만 아니라 문화를 생성해내는 힘을 가진 여성이었다. 벨은 쾌락과 생식으로 여성이 분할되기 이전의 여성으로서 헤타이라의 모습을 그렸다.
가부장제의 근간인 여성의 분할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가 한 가지 큰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성매매 종사자 외의 직업을 갖거나 주부가 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성매매 종사자와 처로 분할된 그 자체를 탈구축하는 것, 그것이 성매매 종사자운동이 갖는 가능성의 하나가 아닐까? [한국인권뉴스]
※ 이 자료는 한국양성평등연대(평등연대)가 제공합니다. 평등연대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와 부르주아적 급진여성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네트워크입니다. http://cafe.daum.net/gendersolidarity
작업공책) 우리가 인식을 수정하기 위해선 잣대가 필요하다.
잣대는 바른 앎이다.
불행을 겪었다면 다시는 그 불행을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정면대응을 하는 것이 만나는 것이다.
드러내는 아픔을 동반하는 것일수룩 더욱 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