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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것은 느림과 다르다.


BY 2007-02-26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
패스트푸드, 더 빨리, 휴대전화 수다… 비참한 인생
느림은 게으름과 달라… 행복을 찾는 적극적인 행동



▲사진설명 : 쌍소 교수는 걷기 예찬자이다.지중해의 온화한 겨울비가 내리자 그는 우산을 받쳐 들고 툴롱 항으로 산책을 나서며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세상을 감상하러 나간다 ”고 했다./툴롱=김태훈기자

가족을 위해 직장에 나가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줄어만 간다. 지천에 널린 음식은 풍요 대신 병든 육신을 초래하고,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할수록 더 바쁘고 쪼들리는 삶에 빠져 허우적댄다. 세기의 전환기를 통과하며, 사람들은 ‘생존과 소유’ 중심의 20세기적 인생관을 깨야 한다는 주장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빠름을 버리고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깨달으라고 하며, 스콧 니어링 부부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건강한 삶을 약속한다고 말한다. 배스킨 로빈스 아이스크림 회사의 상속을 거부한 존 로빈스는 육류와 단것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라고 역설한다. 이 밖에도 로버트 기요사키, 퀴스텐마허, 제러미 리프킨 등‘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앞장서 온 선각자들을 만나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연재한다. (편집자)

2000년 6월 한국 독서계는 한 사람의 프랑스 철학자를 발견하고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는 우리에게 강렬한 목표의식을 버리라고 요구했으며, 뛰는 대신 걸어가라고 타일렀고, 카페인이 든 커피를 마시고 깨어있기보다는 알코올이 든 포도주를 마시고 긴장을 풀라고 했다. 물질과 효율, 경쟁과 속도로 규정되는 세상을 살다 뒤통수로 맞은 IMF 태풍의 여진 속에서 모든 삶의 가치와 미덕이 뒤집히고 파헤쳐진 이 땅의 피곤한 영혼들. 그런 한국인들을 한없는 매혹으로 빨아들인 것이 피에르 쌍소의 ‘느림의 철학’이다.

지난해 11월 15일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툴롱에서 만난 74세의 노 철학자 쌍소 교수는 그의 자유분방함을 엿보게 하는 말총머리를 하고 나타나 한국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중학교 교사를 거쳐 그르노블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다 68세의 나이로 강단을 떠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변신, 지금까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 등 느림의 미덕과 참다운 삶의 모습을 주제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동방의 먼 나라에서 나를 만나러 온 것을 보니 한국도 바쁘게 사느라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 한국에서 당신의 책이 인기를 끌자 모두가 놀라워 했고 느림이 갖는 호소력을 분석하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했다.

“현대 사회는 느림이라는 처방이 필요한 환자다. 그런데, 현대인이 속도의 병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나같은 학자들의 몫이다. 사람들은 철학자를 지나간 과거나 분석하고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철학자를 ‘미래를 처방하고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새롭게 정의하고 싶다. 예언하는 철학자로서 나는 정보화 시대의 특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느림을 주목하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 가치를 발굴했다는 뜻인가.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행동에 옮겨, 더 빨리 목표를 쟁취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빠름으로 달려가면 갈수록 우리의 삶이 여유로워지기는 커녕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한다는 데 있다. 그런 악순환에 빠지면 삶은 각박해지고 일상은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사진설명 : 70을 넘긴 고령이지만 그는 아직도 삶의 에너지를 만끽하고 있다.인터뷰에 앞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고 있는 쌍소 교수.

쌍소 교수는 어린 시절 집시들과 함께 지낸 독특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때 보았던 집시들의 삶에서 반문명적이고 탈도시적이며 가치 지향적인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묻는다.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고. 그가 삶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써주는 첫번째 처방은 ‘속도를 줄이는 것’이다.

-삶을 즐기려면 느려져야 한다는 적극적 제안과, 느림을 나태와 구분한 설명 등이 모두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선 것 같다.

“나태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으른 상태인 반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그것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멋진 풍경을 발견한 뒤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걷는 것, 또는 풍요롭게 살기 위해 서재에 들어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스키여행의 목적이 오직 스키만 타는 것이라면, 오가는 길이 막혔을 때 초조해 하고 여행을 망쳤다는 생각에 화를 낸다. 그런데 스키도 타고, 여행의 동반자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주변 경치도 둘러 보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이처럼 느림의 가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쌍소 교수가 느림의 실천 덕목으로 권하는 것은 걷기와 사색이다. 아침마다 부인과 함께 산책에 나서고 한 밤중이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자택 창가에 우두커니 기대 서서 사색에 빠져 있는 그는 나르본에서 명사로 대접받는다. 덕분에 “배관공을 부르면 공짜로 집을 고치는 혜택을 누린다”고 자랑도 서슴지 않는다. 인생 코스도 직행보다는 완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교수임용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지인들의 예상을 깨고 중등학교 교사를 자원했다. 교사 시절 ‘산책 취미’ 때문에 제자들의 항의를 자주 받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출근길에 길에 핀 꽃이며 하늘의 구름을 보느라 걸음이 늦어져 수업시간을 못 맞출 때가 많았지요. 학생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걷는 시골길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었답니다.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을 긍정하는 힘도 얻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사회는 빠름을 찬양하고 있지만, 개인은 느림을 추구함으로써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60세 정년’ 규정을 깨고 예외적으로 8년 더 교수로 재직할 수 있었던 것도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에 ‘유혹하지 않으리라’라는 책을 냈던데. 적지 않은 나이에 오히려 남들보다 바쁘게 사는 것 같다.

“그 책은 이미 30만부 이상 팔렸다. 나르본의 집을 떠나 툴롱에 온 것도 이 책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의사소통을 주제로 책을 쓸 계획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바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느림을 물리적 속도로만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느림은 나만의 리듬을 따라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일로 인한 스트레스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비결은,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하고 능력 밖의 일은 빨리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신나고 재미있게 일 하면서 ‘바쁘다’고 푸념하는 사람은 없다.”

-‘조급함’이라는 현대병을 문제삼는 진지한 책 치고는 너무 유머러스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웃음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연상하는가? 나는 ‘여유’라는 말을 떠올린다. 자신의 삶을 한 호흡 가다듬고 다시 보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 또는 유머를 나는 ‘느림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웃음은 사색의 기회를 주는 묘약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도 마음이 급해지려 할 때 한 번 미소를 지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빠름이 그토록 나쁜 것인가. 한국은 온 국민이 핸드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속도와 빠름을 강조하는 나라다. IT강국이란 찬사도 듣는다. 그 모든 것이 부지런하고 빠르게 움직인 덕이라는 믿음도 강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빠름의 미덕을 일부러 외면해야 할 정도로 너무 빠르다. 성장 촉진제를 투여한 닭으로 만든 패스트 푸드를 파는 가게와, 온통 주입식 교육으로 지식만 빨리 전달하는 교실은 다른 장소이지만 같은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유기농산물을 주목할 것, 같은 지식이라도 토론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할 것, 감기에 걸렸을 때 약보다는 휴식을 처방할 것. 이런 것들은 느림을 강조하지 않으면 가벼운 코웃음 속에 버려지고 말 가치들이다. 핸드폰 들고 수다떠는 것도 아주 불행한 일이다. 가능하면 입은 다물고, 대신 눈을 열어 주변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몸이 느림을 향할 때 정신은 더욱 깨어나고 삶의 깊은 의미를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느림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포도주. 숙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숙성도에 따라 맛이 다르다. 느림은 오래된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