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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랑할 때 . .


BY 2005-08-08

 

사랑은 힘이다.

사랑이 없으면 삶은 탄력을 잃고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다. 무언가 한가지 빠져 버린듯한 음식 맛처럼 허전하고 ,  가슴이 휑하니 빈 듯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만남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흥미를 잃게 된다.

 

물질의 최소단위 인 물, 불, 공기,흙 ! 이들은 사랑으로 결합하고 ,사랑이 없으면 결합력을 잃어 버린다고  고대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말했다. 자연이 아닌 사회 과학적으로도  부부 관계에서 빠져 버린 사랑 , 사랑이 결여된 부모 자식의 관계. 진한 사랑이 교감하는 친구 관계 , 등 모든 관계에서 사랑을 빼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 까? 사랑이라는 묘약의  최고 기능은 결합력이다. 

사랑은 우리 삶에  꿈과 희망을 주고, 사소한 것에도  기뻐 할 줄 알게 하며,

작은 것에도 중요한 의미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들은 태초부터  지금 까지 사랑을 찾아 가려고 노력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神 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모습을 만드시고 그 속에 혼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자손을 만들어 번창 하라고  사랑이라는 묘약을 몰래 숨겨 넣으셨나 보다.

그 묘약을 통해 자식생산의 적기의 남,여 들이 한눈에 뿅 가게 하는 사랑을 통해 결합하여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만드신 것이다.

세기적 사랑도 그 콩깍지는 2년8개월을 넘지 못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신의 섭리인가?사랑의 사용 보증기간이 있기에 ,사랑은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리라.

평생 콩깍지가 벗겨지지않는 다면  . . . 얼마나 좋으련만 ,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삶에 있어 싫증 나지 않는 좋은 일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상처 받기 쉽다. 우리는 불완전한 상태로 실망과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된다. 하나의 인간관계를 이룰 때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을 지니고 하나로 결합한다. 이렇게 모여서 함께 기록하고 생활하며 새로운 경험을 서로 나누고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과거의 두려움과 기대 또는 습성의 그늘에서 서로 행동하기 때문에

희망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으며, 서로의 의견이 각각 다르고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충돌 없이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면 즉시 비난의 대상을 찾는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자로 생각한다. 만약 어떤 일이 '결백한' 나 자신에게 있다. 나에게 해를 가한 자에게 해를 주고, 환멸을 준 자를 실망시키며, 상처와 고통을 준 자에게 응당 고통을 주었을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믿는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들이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고 될 수 있으면 영원히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잘못된 것은 오직 이런 방법에 의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마음속의 상심의 응어리가 풀리며 고통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었다'라고 합리화하고 만다(그러나 그것이 항상 그들의 잘못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복수를 원한다. 복수를 하고 나면 우리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복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큰 어려움을 겪고, 마침내 벼르던 복수를 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 그들은 몰인정하고 고독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한다. 이러한 고통이 여전히 남이 있는데

고통을 주었다고 해서 우리는 대체 어떤 만족을 얻었다는 것인가?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방법으로 남의 성한 눈을 뽑아 내어도 우리의 눈은 여전히 하나이며 잃어버린 한쪽 눈은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오래된 서로의 관계조차 의심한다.

많은 기쁨을 주었고, 오랜 지속을 위해서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 관계를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하려 든다.

거친 말 한마디, 분별 없는 행동, 무심한 비판이 우리의 가장 밀접한 인간관계

까지도 파괴해 버릴 수가 있다. 우리는 과거의 좋았던 일은 쉽게 잊어버리고

증오의  각본을 합리화시키기에 바쁘다.

우리는 정직한 평가와 대결에 맞서기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용서와 연민을

지닌 행동이 갖다 줄 자신의 새로운 인간적 깊이와 미래의 인간관계에서의 새로운 많은 가능성을 무시해 버리려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자만심이 강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자멸적 행위를 하려 든다.  즉, 그 상황에서 도피해 버림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과 기피함으로써 일을 끝내 버릴 수 있다는 환상과 상처를 주고  모욕과 비난과 힐책을 함으로써 우리의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는 순진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았을 때 제거되지 않는 증오심과 고통과 복수심을 쓸데없이 가중시키게 되는 것이 상대방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물론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 자신을 이겨내고 복잡한 감정의 거미줄에서 즉시 벗어나기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고통에서 탈출하는 것이 보다 쉽게 여겨진다. 이것을 잘 다루어서 해결 하기 보다는

비난,  고발, 힐책, 제거, 저주를 하게 된다. 용서는 고발이나 문책, 분노나

결점을 찾는 가운데서는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그 사람 본래의 모습보다 더 낫거나 더 못하지

않은, 우리 자신처럼 생각하고 평가할 때에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유한의 목숨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평범한 인간성 때문에 이런 상황은 언제라도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 해야 다.

 

우리도 지금과 같은 환경이 아니었다면 광적인 히틀러 청년단이나 병들고 겁에 질려 제대로 행동할 수 없는 사회적 정신장애자의 일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쉽게  상상되어지지는 않으며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자신은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악한 세계는 자신과 전혀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해와 용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더위와 함께 증폭 되어지는 이 사회의 이분법 논리들을 조금 이라도 사람냄새
풍기면서 해결 하는 방안은 그속에 사랑을 심어보자 .

 

지금은 사랑의 바이러스를 전염시켜야 할 때이다.

수명만 늘어나는 장수 보다는  . . . .
사람 냄새 물씬하게 풍기는 장수 나라가  되었으면 . . . .한다. 
그 곳을 향하여 
우리는 가고 있는 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