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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시민에게 드리는 글 (펌)


BY 고뇌하는 인 2000-08-22

한 시민이 시민들께 ;

저는 독일에서 학위를 한 후 현재 대학에서 논리학, 윤리학 등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40대 중반의 일개 白面書生입니다. 물론 주변에 의사와 약사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집에 환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저의 자식놈이
'Fallotsche Tetralogie'라는 심장기형으로 독일과 한국에서 두 번 수술하였고,
또 20년 이상 투병하는 형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 가는 것이 다반사인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게시판을 방문하는 시민들께 올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행위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성찰을 하는 철학도로서
의료대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대해서 일말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의사들의 "전면적인" 의료거부행위는 그 목적이 어떠하든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왔고, 이런 입장을 여러 번 완곡히
개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의약분업의 핵심인 약물남용 방지를 위한
대체조제, 임의조제의 제한이 비록 현재 不實하더라도 결코 지금까지의
투약과 관련된 관행보다 더 나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 또 "미래의 살인을
막기 위해 현재의 살인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 등이 그 대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만일 의사들이 "전면적인 폐업"을 한다면 저의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위에서 의사들의 "전면적인 의료거부행위"는 사실상의 대체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수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주장은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 그리고 국민 뿐 아니라
의사 분들 스스로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었고 또 지금도 인정하리라 믿습니다.
여기 잘 알려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한 군의관이 전장터에서 후송된 병사들을 정성껏 치료하여
살만하게 만들면 다시 전선으로 투입돼 아예 죽거나 다시 부상당하여
오는 것을 보고 醫術의 가치에 대해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됐습니다. 이런 고뇌의
와중에서 불현듯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부상병을 치료하러 가벼운 걸음으로
전장터로 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깨달은 바란 다만 '그렇지, 나는 의사지!'라

단순한 확인일 뿐이고 어쩌면 매우 싱거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유명한 禪問答에 속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은 그 군의관의
뱃속을 알아보라는 것이지요. 쉬운 얘기만은 아닙니다.

저는 의사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그 유일성,
그리고 이 유일성이 바로 醫權의 근거이며 따라서 의권회복의 要諦도 의사의 유일성과
대체불가능성의 확보에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의료행위의 포기"는 결코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 의사들이 지적하는
의약분업안의 독소조항, 기형적인 의료보험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에 대한
의사들의 公憤과 저항을 전적으로 이해하며 또 지지합니다.

특히 현재 의료대란의 중심에 서양의학과 약학이 놓여 있고, 이 西洋醫·藥學을
수 백년 동안, 연구 및 시행하여온 선진 歐美國家의 의약분업적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또 현정부의 首長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고 나아가 바로 의약분업이라는 세계적인
"STANDARD"를 도입하려는 것이 이른바 의료개혁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들은 그들이 의사들의 입장을 기득권 확보 내지는 금전적인
측면에서만 보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실은 그들 먼저 스스로 국제적
기준에 합당한 의약분업안을 제시, 시행했어야만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글에서 한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께 근거 지워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이미 충분히 드러난 의약분업안의 구체적인 문제점이라기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다음의 두 가지 사실입니다:

1. 현재 수련을 거부하고 있는 전공의들의 행동은 시민단체, 언론, 정부의
그 어떠한 도덕적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이점을 우리 시민들
스스로 확인하고 공감하는 것은 단순히 의사들의 손을 들어준다는
小我的인 시각에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基底와 관련된 것입니
다.

2.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은 그들이 어쩌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지라도 사실상 '파시스트적' 발상과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때 제가 사용하고 있는 "파시스트적"이라는 표현은 결코 단순히 주관적인 욕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事實과 史實에 바탕을 둔 객관적인 표현입니다. 즉
자유민주주주의를 국체로 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가 그 基底에서
이번 의료대란을 통해 정부와 시민단체, 언론에 의해 심각히 부식되어 가고
있다는 점, 아니 차라리 전공의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전공의들의 수련거부행위가 정부, 시민단체, 언론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는 점을 여러 시민들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과거에도 또 현재에도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모든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응급환자들을 치료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개업의들의 파업률이 시작부터 50%를 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감소,
현재는 대부분 병원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결코 대체의료인력 없이
환자들을 放棄하지 않았다는 객관적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현재의 의료대란에서
의사들의 행위는 "예외 없는 전면적인 의료행위거부"가 결코 아니며 따라서 현재 정
부와
시민단체, 언론에서 異口同聲으로 주장하는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삼고 있는 상
황"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공의들의 행동은 이들을 현재 가장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정부, 시민단체, 언론의 비판대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게시판에 여러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의 호소는
모두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환자들의 수술이 분명 전공의들의
수련거부로 인해 지연되었다면 환자들과 그 가족들은 전공의들을 심정적으로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전공의들은 일단 용서를 빌고, 무엇보다도
대체치료의 필요성이 있다면 의사들은 그 가능성을 알려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공의들이 이들 환자의 생명을 인질로 삼았다거나
죽음으로 방치하였다는 표현은 앞에서 말한 이유로 정녕 옳은 것이 아니며,
법적으로도 직무유기란 자신 이외에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가 없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가 국공립병원, 군·경찰병원을
개방하고 또 대부분의 개원의들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빙합니다.

해서 전공의들의 행동은 역설적으로 모든 의사들이 의료행위를 떠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정부가 전공의들의 수련거부를 통한
투쟁을 無化시키려는 수단, 즉 가능하면 많은 의료기관이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은 역시 역설적으로 전공의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설사 환자와 그 가족들이 전공의들의 행동을 심정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고 해서
해서 정부, 시민단체, 언론이 전공의들을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함정을 파놓고 다른 선량한 사람을
어쩔 수 없는 범죄로 유인한 인간이나 조직이 그 사람을 도적적으로나 법적으로
비난할 수 없듯이, 또 한 인간의 합법적인 방어가능성을 완전히 빼앗고
조직적으로 파괴하려 할 때 자기를 방어하는 행동이 정당방위이듯이
현재 정부, 시민단체, 언론은 비록 그 경중과 서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공의를 자기방어적 행동으로 몰고 간 진정한 원인제공자, 심하게 표현하면
眞犯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시민들은 현재의 전공의들의 행동이 지난 4.13 총선 때 총선연대의
초법적 행동을 정치개혁이라는 이름 하에서 4.19, 5.18 등의 線上에 올려놓고
용인하려 들었던 한 위정자의 腹心보다 그 동기와 목적에서 비교할 수 없이
순수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전공의들은 무엇보다도 정당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환경과 이러한 정당한 의료행위에 대하여
정당한 인정을-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라는 것 뿐 이며 지금까지 사회에
대하여 소박한 소망이 아닌 개인적 야망과 허영을 실현하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한 바 없고 또 할 수도 없었던 순수한 청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전문지식인의 길을 가는 청년들과 그 본질에서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학자의 길은 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분야에 대해
갖는 기쁨과 정열, 때로는 唯我的인 도취, 그러나 비전문가들의 편견 앞에서 갖는
미모사 같은 내적 비애와 슬픔 등이 그것입니다.

그 동기의 순수성은 대부분의 전공의들이 돈보다도 우선 정당한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애절하게 희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이러한 환경이
결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또 이미 실현되고
있는 지상의 많은 선진국가들의 예를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증명되며,
따라서 이들을 단순히 이상주의자로 몰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 시민들은 보아야 합니다. 저 또한 적지 않은 세월 외국과 한국에서
자식과 가족의 중병으로 인해 밥먹듯이 병원과 약국을 들락거리면서
한국의 의료상황에 대한 한국의사들의 개탄과 개선을 위한 주장이 갖는 설득력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젊은이들의 날개를 꺾고,
입을 막음으로써 이 사회와 우리 시민들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또 이렇게
젊은이들에게 비이성적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를
시민들은 냉철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저는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일부 언론들의 행위 기저에 어쩌면 그들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파괴적
태도, 즉 '파시스트적인 행태'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였던 관계로 히틀러가 어떠한 방식으로 국민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았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그의 수하 돌격대를 이용하여 사회적
약자와 소수, 그리고 지식인들을 절멸시켰는 지를 약간이나마 들은 바가 있습니다.
특히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 유발에 당시의 대중매체, 특히 영화 등을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선동하였는 지도 듣고 보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한 선동적 영화로 "Der s e Juden(달콤한 유태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 자체로는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때 당시 대부분의 평균적 독일인의 머리에 유태인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이나
혐오감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히틀러는
바로 이 약간의 혐오감을 극대화시키고 왜곡, 과장을 반복하면서 우매한 국민으로부

시작하여 국수적이거나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대중적 지식인, 언론인, 예술가에 이르
기까지
차례로 장악하면서 정권탈취와 유지에 교묘히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유태인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사회적 타부로 금기시 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직업적으로나 지식인으로서 성공하였던 많은 유태인들을
거리에 내몰아 길바닥 청소를 시킴으로써 우매한 질투심을 만족시키고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날조된 적개심을
바탕으로 유태인들을 절멸수용소의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현재 의사들을 욕하는 많은 시민들이 의사들로부터 당했던 불쾌했던 경험을 말합니
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저는 의사 뿐 아니라, 정치가, 기자, 검찰, 경찰, 약사, 교수, 교사, 변호
사,
상인 등등 아마도 제가 경험한 모든 직업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때로는 좋은, 때로는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우 자신 있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또 그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며 제가 가르친 학생들중 일부는 저로부터 좋은 경험을,
일부는 나쁜 경험을 했으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이 게시판과 저 게시판에서 의사들에게 향해지는 경험적인 비판이
전혀 근거 없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의사들이나 간호사들에게서
경험하는 불친절이 환자나 그 보호자에게 특별히 깊이 각인된다는 점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즉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저도 의사들을 비판할 줄 압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도대체 우리가
의사들을 적으로까지, 인간말종으로까지 간주해야 할 그 어떤 절실한 이유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처럼 소수의 계층, 특히 소수의 지식인들이
진실을 외치고 진실을 위하여 시민들에게 호소할 때 이를 집단적인 여론조작과
우민선동정책으로 호도하는 것을 당연한 통치술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저는 '파시스트적'이라는 표현 이외에는 달리 부르지 못합니다.
.
서양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veritas odium parit=진실은 증오를 불러일으킨
다"
이제 위 속담에 현재의 의료대란을 비추어 볼 때 과연 누구의 증오이며 누구를 위한
증오이며 또 누구에 의한 증오이겠습니까?

현 정부의 首長이 對外이메지와 국민여론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이고
정치가라면 當然之事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나아가 조작을 한다면 우리 시민들은,
특히 지식인들은 적어도 때때로 얼굴을 찡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대중매체 시대인 현대는 사실홍보와 사실조작의 경계선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두고 무조건 정치가를 욕할 수도 없습니다. 때때로 한 정치가가 자
신을
조작적으로 홍보해야만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지와 관계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메지 조작과 여론조작을 통해 일부 소수의 의견

탄압하고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 시민들을 선동한다면 얼굴을 찡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때는 시민들이 분명한 線을 그어야 합니다. 만일 그 선을 긋지 못하
고,
특히 지식인들마저 한국적 지역감정과 온갖 정치·사회적 이해와 싸구려 이데올로기

광신에 빠져 여론조작의 한계에 대해서 위정자의 코앞에 "No!"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명칭에 관계없이, 그 외적 포장에 관계없이 파시스트적 사회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이러한 국민선동과 여론조
작이
먹혀 들어가고 진실된 소수가 무참히 제압 당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파시스트
국가의 문턱을 깊숙이 넘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히틀러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수상으로 선출된 사람입니다.

한 신문에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내려온 북한의 한 의사에게 "북한에도 의사들이
파업하느냐?"라는 질문과 대답이 기사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사의
의미는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듯 합니다. 그 기자가 젊었던 늙었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成人이라면 이 경우 독재국가 북한을 비교의
척도로 삼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나아가 그 기사가 편집회의 등 데스크를 거쳤으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일은 결코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분명 의도적으로 실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파시스트 독재국가의 척도로 재단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진실에 대한 능멸이며 파시스트 아니면 불가능한 행동이고 愚民化的 煽動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혹자는 진보를
지향하는 그 신문을 어찌 파시스트와 연결시키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시스트적'이란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행위방식'을 말합니다.
해서 극우-, 극좌-, 자본주의적-, 공산주의적 파시즘이 가능하고 또 존재하는 것입니
다.

바로 이 점에서 단세포적 반응이 아니라 사태의 전후맥락을 파악하고 무엇이 시민사회

위하여 옳은 것인지 생각하는 시민과 지식인들은 현재의 의료대란과 관련하여
전공의들의 호소가 단지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수년간 대한민국에는 "국민의 이름으로", "개혁의 이름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이 强行될 것이고 이를 위해
厚顔無恥의 언론조작이 자행될 것이며 또 현재 이미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진실들이 묻혀지고 역사가 날조될 것이며 이데올로기의 狂風이
아직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과 愚民들을 선동하며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시민들 스스로 이번 의료대란에서 그 원인제공자인 정부와 그 부화뇌동자인
언론과 시민단체의 파시스트적 行惡을 적시하고 선을 긋고 저항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순수한 전공의들의 행동이 실패할 경우 어제는 교직자, 지금은 의사,
그리고 내일은 자유시민과 지식인 모두를 불태우고 결국은 우민, 지식인
할 것 없이 모든 시민이 입다물고 눈감고 귀막고 살아야 하는 忍冬의 세월이
오리라는 것, 따라서 현재의 의료대란은 그 徵兆에 해당된다는 것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당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겨울 이야기』로 잘 알려진 독일의 저항시인 하이네의 유명한 警句가 있습니다:
"책을 태우는 자 결국은 나라를 태운다." 책은 지식인들이 씨름하는 대상입니다.
이제 책과 환자치료와 씨름하는 젊은 의사들을 태우는 자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태울지는 자명합니다. 해서 저는 이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서 '시민이 의사에게
(C2D)'
'의사가 시민에게(D2C)' 말을 건네는 것 뿐 아니라 '시민이 동료 시민에게(C2C)'
서로의 이해와 진실을 나누고 호소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시민이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2000/08/22(1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