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고 말간 당신께.
사랑하는 당신은 오늘도 늦으려나 봅니다.
내가 9시 뉴스를 보며 당신의 햐얀 와이셔츠를 다 다릴때까지도 당신의 계단 밟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며칠전, 당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세운 패션몰이 오픈을 했지요. 우연찮게도 우리가 사는 동네 근처에 지어져서 당신은 오픈일이 보름이나 남았을 때부터 행사구경 가라고 했었지요. 그럴때마다 나는 별 관심 없는 듯 대답을 하는 듯 마는 듯 했어요.
...
우리가 1년반을 절실한 인연으로 연애를 하고 부모님께 의지해 결혼을 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닥친 어려움은 경제력이었지요. IMF가 1년~2년 쯤 지난 뒤임에도 우린 결혼전 보다 수입이 줄어 6개월쯤까지는 저금 한 푼 못했어요.
지금은 우리가 그때보다 형편이 펴서 푼푼히 저축을 할 수 있게는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걱정스럽기만 했었죠. 그래서 당신은 일을 많이 하더라도 월급을 좀 더 주는 곳에 가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간 곳이 바로 지금 다니는 회사지요.
회사를 옮긴 당신의 "참 좋다"고 했어요.
뿌연 작업복을 입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버티컬 청소를 하던 일에서 이제 그 뿌연 작업복을 벗고 하얀 깃 와이셔츠에 파란빛 넥타이를 메고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좋을만도 하지요.
당신은 무엇보다도 점심 제공을 해줘서 좋다고 했어요.
사비 들이지 않고 먹고 싶은 거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지요. 나 알아요. 그 전 회사에 다닐 땐 점심값 아끼려고 싸구려 분식만 먹었다는거. 그리고 때론 거르기도 했다는거.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나 힘들까봐 도시락 싸가겠다는 말도 못했다는 거 다 알아요.
미안해요. 그때 나도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당신이 회사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겨우 눈치챘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밥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화를 냈던, 그러면서 "화내서 미안해. 바빠서 점심을 못 먹었거든. 배가 고파서 화가 났어. 미안해."라고 말하는 당신의 얼굴이 부쩍 거칠어졌다는 것을 정말 바보같이 그때서야 알았지 뭐예요. 그리고 그제서야 도시락을 준비했죠. 커다란 도시락통을 친정에서 가져와 하얀 밥을 담고 몇가지 반찬들을 조근조근 담고 작고 투명한 병에 국이나 찌개를 담았어요. 당신은 "고맙다"고 했고 그렇게 몇 번을 도시락 점심을 먹고 지금 다니는 회사로 직장을 옮겼어요.
이제는 당신이 점심을 거르진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은 놓였어요.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 하더니 나는 아내로서의 욕심이 생기더군요. 이제는 당신이 매일 늦게 오니 그것이 또 걱정이지요. 매일 10시, 11시가 되어야 지친 어깨를 하고는 집에 돌아오는 당신. 초인종을 누르면서 표정관리를 하는지 매일 표정은 씩씩하지만 은빛 안경 넘
어 보이는 빨갛게 충열된 커다란 눈은 하루의 피곤함을 가득 담고 있는거 모르죠?
패션몰 오픈 한달 가량을 남겨 놓고는 더욱 늦어진 당신의 귀가에 난 서서히 화가 나고 있었어요.
매장을 분양하고 계약된 서류들을 정리하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을 하는 당신은 오픈일이 다가 올수록 일이 많아진다고 했죠. 당신의 귀가는 11시에서 12시, 12시에서 1~2시, 2시에서 3시, 3시에서 급기야는 4시까지 이어졌어요. 그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면 자느라고 정신 없고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는
다시 회사로 향하고...토요일? 일요일? 당신에게 언제 주말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던가요. 당신은 "오픈만 하면 한가해질거야. 오픈만 하면..."이러면서 나를 이해시켰어요. 나는 패션몰 공사장 앞을 일부러 가봤어요. 건물이 점점 제모습을 갖추는 것을 보니 마치 당신이 혼자서 저 건물을 뚝딱뚝딱 만드는 것만 같았어요. 그것을 보며 나도 속으로 '이것만 완성되면..이것만 완성되면...'했지요.
처음엔 당신이 안쓰러워 힘내라는 편지도 보내고 당신이 집에 올때까지 기다리면서 잘 참았지만 나중에는 매일 혼자서 저녁을 차려 먹는게 싫어서 화를 버럭 냈지요. 화가 난 나는 일주일이 가깝게 당신과 말도 안하고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리곤 당신이 오픈일이 가까워졌다고 해도 들은 척 만척 했고, 먼저 잠을 자곤 했어요.
...
오픈 하루 전이었죠? 내가 그날도 혼자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뻥! 뻥!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일인가 놀란 나는 창문을 열었죠. 와, 세상에....하늘은 온통 휘황찬란한 불꽃이 가득했어요. 불꽃놀이를 하는 소리였지요. 까만 하늘에 별빛보다 환한 불꽃들이 커다랗게 쏟아지고 있었어요...그 밑엔 당신의 회사에서 세운 패션몰의 빨갛고 파란 네온사인이 건물선을 따라 밝게 빛나고 있었구요.
쏟아지는 불꽃들을 보면서 저는 그만 화가 난 것도 잊고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요.
"지금 불꽃놀이해! 우리 창문에서 패션몰도 다 보여. 주위는 다 어두운데 불꽃놀이랑 패션몰만 환해서 더 잘보여.
불꽃이 쏟아지고 있어!" 흥분해서 떠드는 제 목소리에 당신도 목소리를 높였어요.
"오늘이 오픈 전야제야. 내일은 진짜 오픈이고. 이제 오픈만 끝나면 돼. 미안해. 그동안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그날 뻥! 뻥! 터지는 불꽃은 나에겐 당신이었어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별빛보다 환했던 불꽃은 당신의 수고로움의 결과를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당신 이렇게 수고했으니 앞으로는 더 환해질거라는 당신의 얼굴이었어요.
........
오픈이 끝나고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당신은 그날 편하게 잠을 잤어요.
잠깐 "숫자가 안 맞아..."라고 잠꼬대를 한 것이 내 마음을 다시 아프게 했지만 전 "괜찮아, 괜찮아..."라고 대꾸했지요.
괜찮아요. 숫자가 안 맞으면 다시 고치면 되고 우리 마음이 틀어지면 다시 화해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우리 이해하며 결혼생활 헤쳐나가기로 해요.
사랑하는 당신은 오늘도 늦으려나 봅니다.
내가 하얀 와이셔츠를 다 다리고 이렇게 늦은 밤까지 편지를 다 쓸때까지도 당신의 초인종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요.
오픈만 끝나면 일찍 온다던 당신은 다른 패션몰 신축이 시작되어서 또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초조해하거나 화내지 않아요.
당신의 그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이 나중에 또 어디선가 불꽃이 되어 환하게 비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이제 당신에게 보낼 이 편지를 잘 봉하고 당신을 기다릴게요.
오늘도 편안히 자고 내일도 씩씩하게 지내요.
2000.11.2. 당신을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애가.
ps. 여보, 우리 돌아오는 12월 5일, 결혼 1주년 기념일에는 뭐할까요? 다른 것은 필요없고 당신을 닮아 하얗고 말간 얼굴을 가진 아기를 소원할까요? 그래서 내년 결혼기념일 때는 셋이 행복하게 지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