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민씨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낸다. 1873년의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회 시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며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혁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황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