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안 방 화장실 세면대에서 스타킹을 빨고 있었다.
그 때 현관 벨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이웃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마을 소식지를 전해 주었다.
아줌마는 마을 소식지를 받아들고 거실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노트 종이 크기 서너장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씩 빠지지 않고 발행되는 신문이다.
그 것을 보면 누가 이 동네에 이사를 오고 가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누구네 집 정원이 '이 달의 정원'으로 뽑혔는 지도 알 수 있었다.
시시콜콜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마을 회의가 열리는 지 또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지도 알 수 있었다.
아줌마는 이 곳 사람들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의 사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마을 소식지를 즐겨 읽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이 달의 정원'에 아줌마가 살고 있는 집 사진이 나오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마을 소식지를 다 읽고 난 아줌마는 뒷 뜰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었다.
이 곳 휴스턴은 겨울에 영하로 내려갈 때가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곳이다.
뒷 뜰에는 열대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아줌마에게 익숙했던 겨울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그 곳에 있었다.
브갱빌레 휘어진 가지에 붉은 잎들이 꽃보다 아름다웠다.
뒷 뜰로 들어오는 문에는 가시 없는 덩쿨 장미가 아치를 이루고 노르스름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개나리로 착각하기 십상인 노란 쟈스민도 한창이었다.
늘어진 가지의 모양도 그렇고, 노랗고 조그만 꽃이 조롱조롱 달린 모습도 그렇다.
휴스턴에서는 겨울에 담장 너머로 노랗게 늘어진 쟈스민을 보는 것이 한국에서 봄에 개나리를 보는 것 만큼 흔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혹시 개나리가 아닌가 의심할 만큼 흡사하다.
아줌마는 쟈스민의 향기에 절로 끌려가듯 다가가 향기에 취해서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야'하는 표정을 지으며 흐뭇해 하였다.
하늘 높이 솟은 종려나무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종려나무에는 다람쥐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코끼리 귀'라고 불리우는 식물도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줌마가 보기엔 토란하고 똑 같았지만, 아줌마는 그렇게 키가 큰 꽃 피는 토란을 본 적이 없기에 이 사람들 처럼 그 것을 'elephant's ear'라고 불렀다.
이 집의 예전 주인의 사위가 정원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뒷 뜰에는 연못도 있고 여러가지 열대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저런 조형물도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이 집에 이사온 후 아줌마는 틈만 나면 뒷뜰에 나와 이리저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거닐곤 하였다.
뒷 뜰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우아함을 즐기고 나서 아줌마는 생각했다.
'역시 미국은 좋은 나라야, 이런 여유와 풍요를 즐길 수 있으니...'
안으로 들어온 아줌마는 저녁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서둘러 식사준비를 끝냈으나 준비가 끝나고 한참 후에야 남편이 돌아왔다.
그 날 따라 늦게 왔다.
집에 오는 길에 교통체증이 심했노라며...
저녁식사 준비도 다 끝나고 달리 할 일도 없는 아줌마는 옷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갔다.
안방 문을 연 남편이 비명을 질렀다.
"여보, 이거 왜 이래?"
아줌마는 무슨일인가 싶어 남편을 밀어내고 안방을 살펴보았다.
그 때서야 아줌마는 생각이 났다.
현관 벨소리가 났을 때 세면대의 물을 잠그지 않고 나갔었다는 것이...
세면대에 물이 넘치지 않도록 일정 높이가 되면 물이 빠져 나가도록 되어 있는 구멍을 스타킹이 막고 있었다.
한 나절 내내 흘러 넘친 물이 안방을 연못으로 만든 것이다.
미국 화장실 바닥은 하수구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물은 욕조 안에서나 세면대에서만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것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당연히 하수구멍이 있을 줄 알고 화장실 바닥에 물을 부어 낭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은 아줌마도 여러번 들었다.
하지만 안방이 물바다가 되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물은 카펫을 적신 정도가 아니었다.
안방에 들어가니 바닥이 낮아 물이 깊은 곳은 복숭아 뼈 위로 물이 올라왔다.
여유와 풍요를 자랑하는 미국의 안방답게 넓은 방이었다.
그 넓은 방 가득 물이 찬 것이다.
여유있게, 풍요롭게...
다음 날 아줌마는 홈 디포(home depot)에 가서 스팀 청소기를 빌려 왔다.
홈 디포는 각종 연장이나 건축에 필요한 물건등을 파는 창고형 체인점이다.
집을 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그 곳에 가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스팀 청소기 처럼 어쩌다 쓰는 물건은 돈을 내고 빌릴 수도 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퍼 낼 수 없는 물은 스팀 청소기를 이용해 하루종일 빨아내었지만 끝이 없었다.
드디어 지친 아줌마는 청소 대행업체에 연락했다.
와서 살펴보더니 그 사람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카펫을 갈아야 된다고 하였다.
페인트도 다시 칠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뒷뜰에 나가 여유와 풍요를 즐기느라 수도 꼭지 잠그는 것을 잊은 댓가로 1200불을 지불했다.
그 것도 그 이상 드는 비용은 집주인이 보험으로 처리해 주어서...
한 나절의 여유와 풍요를 즐긴 비용치곤 좀 과다한 비용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왜 화장실 바닥에 하수구멍을 만들지 않는 지 아줌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똑똑한 한국 아줌마를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었을텐데...
아줌마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역시, 미국은 사람 살 곳이 못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