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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안에서


BY lmh322 2002-01-22

그 해, 그러니까 82년 가을 소풍때 였습니다.
학생들을 일시에 풀어 놓을 수 있는 장소가 한정되어 있던 터라 가다 보면 갑돌이랑, 순돌이도 만날 수 있어 가슴 설레는 그런 날 이었습니다.
김해 왕릉..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소풍 장소로 더 없이 애용되던 곳이었지요.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많이 없어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꿈도 꾸질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버스로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곳이거든요)
그 날은 처음 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했습니다.
영도대교 근처의 버스 (7번이라 기억 됨)정류소에서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늦었던 저는 마음이 몹시 급해서인 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정류소로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차도와 인도 사이의 미묘한 불균형으로 인해, 발을 헛 짚어 그만 정류소 앞에서 넘어 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창피해서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도시락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근데 버스안에는 우리 학교 여학생보다 인근의 00고등학교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우아하게 남학생 사이를 스쳐 지나갔을테지만 , 그날은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 자리나 잡아 볼려고 버스 뒤로 들어가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내리는 사람은 없는데 자꾸만 학생들이 단체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밀려 자꾸만 뒤로 밀려 간 저와 친구들은 힘으로 밀어 붙여 맨 뒷좌석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뒷 줄에는 남학생들이 쭉 앉아 있었는데 , 자리를 양보해 주는 기사는 하나도 없더군요.
워낙 비좁아 손은 손대로 몸은 몸대로 제각각 노는 바람에 서 있기가 몹시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남학생들의 다리랑 배낭이 뒤섞여 발을 디디기도 쉽지 않았지만 , 재수가 좋았던 지 저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짐꾸러미에 엉덩이가 걸리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다가 나중에는 점점 체중을 실어 갔지만 , 아무도 말리지 않더군요. 저를 본 친구들은 저의 행운에 몹시 부러워하였습니다.
평소에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던데.. 저는 느긋하게 엉덩이에 힘을 싣고 다리를 편하게 쉬게 해 주어 곧이어지는 무대에서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쉴새 없이 떠들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무슨 망신인 지 ...
왕릉에 도착하여 앞에서 차례로 빠져 나가는 학생들의 뒤를 따르려고 자리에서 일어 나는 순간 , 그 폭신했던 짐꾸러미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학생들에게 밀려 엉거주춤하게 배낭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던 지지리도 재수없는 한 남학생의 등이었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비좁은 차안에서 친구들과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던 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한마디 말도 않고 깔려 있었던 그 애의 잘못도 조금 있고요.
저에겐 복잡한 만원 버스안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추억이지만 , 그 남학생에게는 몸이 부서지는 고통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