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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에 출연을 거부한 차인표


BY vitzaru 2002-01-31

희망은 있다

- 영화 [007]에 출연을 거부한 차인표 씨의 글을 읽고

노 무 현


아주 짧은 한편의 토막 글이 나를 감동시켰다. 아니 감동의 끝에서 내 마음은 울고 있었다. 글을 읽는 동안 이미 시큰거리기 시작한 코끝을 감싼 채, 하염없이 비행기 창문만 바라보아야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는 영화배우이자 탤런트이다. 그런 그에게 [007] 영화의 출연 교섭은 천재일우(千載一遇)와도 같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가 기꺼이 제안에 응했다 해서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거절했다. 한반도의 상황을 왜곡시켜 표현한 대본 때문이었다. 감동을 능가하는 그 무엇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사실 그에게는 '돈'과 '인기'가 전부일 수도 있다. 그걸 좇아 움직이는 것이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는 기회를 포기하고 자기 삶의 가치와 보람을 선택했다. 용기 있는 그의 선택 앞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어쩌면 우리 정치인처럼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없는데……. 그렇게 '삶의 가치'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사람들도 없는데……. 과연 나라면, 또 우리라면 차인표 씨처럼 그렇게 당당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렇게 했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신년 벽두. 그 짧은 글이 나에게는 가슴 벅찬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진한 감동의 여운 속에서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흔들리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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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씨의 글>

미국 촬영을 위해 도미한지 사흘쯤 되던날, MGM 영화사의 케스팅 디렉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007 영화 제 20편의 케스팅 디렉터인데, 오디션을 볼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중략)

저는 토니에게 계약을 하기전에 완성된 대본을 보아야만 결정할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정확히 두시간후 제가 묶는 호텔에 007 20편의 대본이 도착을 했습니다.

대본은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었고, 겉표지와 모든 페이지에 옅은 검정색으로 282 라는 숫자가 수도 없이 찍혀있었습니다. 이는 복사방지를 위한 것으로, 또한 대본의 내용이 경쟁사에 새나가는걸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즉 제가 받은 대본은 007 20편의 대본중 282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200 명이 넘는 스텝과 또 수많은 연기자들에 비해 대본을 상당히 적게 찍어낸다는 걸 알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보안을 위한 장치인것 같았습니다.

대본을 읽었습니다.
제가 맡은 문대령역은 007과 맡서 싸우는 북한의 (대본에 의하면 ) 멋있고, 잘생긴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그래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엘리트 장교 였습니다.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아버지 문장군이 평화를 사랑하는 반면, 아들 문대령은 힘으로 통일을 하고, 일본까지 점령하여 미국과 맡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
었습니다.

문대령의 부하들중 한사람으로 자오라는 인물이 있었고 ,
이 역으로는 이미 릭윤씨가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국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역만 놓고 볼때는 비록 악당이지만 비중있고, 매력있을수 있는 역이었습니다.영화 시 작 약 20 여분과 끝 15분 정도에 007과 맡서 싸우는 만큼,007을 제외하고는 가장 비중있는 역이었고,문대령의 전투 장면도 스포츠카전투, 비행물체를 이용한 공중전, 폭포에서 떨어지며 싸우는 수중전, 마지막에는 007과의 주먹싸움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았을때, 제 마음은 이미 영국으로 날아갔고, 전세계 스크린에 비춰
질 저의 모습을 잠시나마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본을 한장한장 넘기면서, 한반도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는 제인젠킨스의 말은 거짓말이 되었고, 역시 헐리웃은 다시 한번 다른나라의 상황을 자신들의 오락거리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007 이 한국에 도착한 공항에, 또 비무장지대에.. 한국군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질 않고, 미군들이 007을 맞아주었습니다.

대본상에서의 북한은 서방세계를 향해 테러를 일으킬수 있는 가장 유력한 나라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그날 새벽 두시쯤 호텔방에서 출연포기를 결심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집사람이랑 정민이 생각, 홈식구들 생각, 그동안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실수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출연을 안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토니 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포기의사를 밝히고, 저 보고 미쳤다면서 펄펄 뛰는 토니의 목소리를 뒤로한채, 전화를 끊었습니다.

대본이 싫어도, 제가 안해도 그들은 007 20편을 제작할것 입니다. 그리고, 20편의 주된 내용은 한반도를 소재로 한 가상상황이 될것입니다.

007 대본의 문장군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007 과 맞대면을 한 자리에서'50년 전에 너네(미국놈)들이 멋대로 들어와서, 한반도를 두동강이로 잘라놓고....
지금에 와서 무엇을 우리 에게 가르치려 하느냐'는 대사입니다. 007의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대본에 써놓은 대사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영화는 만들어 지겠지만, 저는 그 영화를 안볼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