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 홍수희
내리던 비 그치고
지금 사방은 고요합니다
아파트 옹벽 위
장미 넝쿨에 엉켜있던 바람도
조용히 잠이 들었습니다
내내 제 향기에 휘청거리던
수풀 속 아카시아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었습니다
바위와 바위틈을 오가던
들고양이도 잠시 동작을 멈추고
푸른 불 켠 눈으로
등을 구부린 채 이 쪽을 바라봅니다
저 녀석 생각하는 것이
웬일인지 오늘은 다 보일 듯 합니다
녀석의 뒤에 버티고 있는 봉긋한
무덤도 오늘은 으스스하지 않습니다
저 죽음 같은 시선에 묻혀
하루의 피로가 따뜻해져오는 시간입니다
문득 생각해보니
처음과 끝이 하나입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갈 일 남았습니다
사랑에서 왔으니
사랑으로 살아갈 일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