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저녁에 외식을 했습니다. 싱거운 저와 아이들은 물냉면을 먹고
화끈한 아내는 비빔냉면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는 제 눈 앞에서 입을 쫘악 벌리고 고르지 않은 치열을 한껏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고춧가루 끼었어?"
아내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귀찮아 할 정도로 게으르거나 핸드백에 거울 넣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준비성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아내 말처럼 '스무 살에 어리기만한 동갑내기 남자를 만나서 6년 연애하고 스물 여섯에 그 남자랑 결혼하여 14년이나 살다 보니, 가정은 팽개치고 헛바람 든 것처럼 나돌아다니는 인간이랑 다투고 투닥이고 죽네 사네 갈라서자 싸우며 어찌어찌 살다 보니, 싸우고 화해하는 와중에도 어쩌자고 생각 없이 자식은 둘씩이나 낳으며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남편이란 인간이 그저 제 몸처럼 스스럼 없고 부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응, 두 개나 끼었네..."
저는 넵킨으로 아내 이에 낀 고춧가루를 빼줍니다. 그러면서 마치 제 이에 낀 고춧가루를 닦아내 듯 저도 모르게 아내처럼 입을 한껏 벌립니다. 그렇게 빼주고 나니 제 입안이 다 개운해집니다. 아이들은 철없는 부모를 보고 자기들끼리 눈을 맞추며 '쿡' 웃고 그런 아이들에게 아내는 눈을 곱게 흘깁니다.
그렇게 아내도 늙어갑니다.
아래 붙인 시는 황지우라는 시인이 쓴 시입니다.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