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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났습니다.


BY yybok7 2002-09-25


                     





초가을 늦은 저녁,
누군가 우리집 양철 대문을 두드립니다.
방문을 열고 어둠이 엷게 내린
넓지 않은 안마당을 지나 대문을 살며시 열었습니다.
지나가는 아이가 장난이라도 친 건지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돌아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내 눈에,
몇 미터 저쪽 어둠 속에 누가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나를 보자 천천히 다가오며 웃음 짓는데,
그 하얗게 빛나는 치아를 보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 차렸습니다.

그는 지금 부산에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며 내게 편지라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와 나는 같은 마을에 살지만
나는 작은 마을에 그는 큰 마을에 사는 이유로
어려서는 얼굴도 잘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가 멀리 부산으로 유학가고
나는 시골에서 인문계고등학교에 다니던
1학년 12월의 마지막 날,
영구라는 아이가 주선한 송년회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편지하나를 주었습니다.
바다만큼이나 푸른 편지지에 쓰여 있는
그의 필체는 너무나 시원스럽고,
나에게 그리운 고향소식과 친구들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커피에 프리마가 용해되듯......."
어쩌구 하고 쓴 그의 문체가 너무 우스웠지만
나는 아마도 더 유치했을 내용의 긴 편지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우리의 인연은 고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생각없이 사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공고에 간 것도 결코 그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쩐 일이냐고 놀라서 묻자
'집에 너무 오고 싶어서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차에 몸을 싣고 밤늦게 집에 도착하여,
일손이 바쁜 형님을 도와 일을 하느라고
낮에는 시간이 없어서,
지금 막차 타고 가려는 길에 잠깐이라도
만나보려고 들렀다'는 것입니다.

바쁜 시간에 나를 보기 위해
한참이나 밤길을 돌아왔을 그를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어리다면 어린 그가 멀리서 학업에 고달파할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합니다.

얼굴을 보았으니 막차 떠나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는 그에게
나는 생미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서워서 돌아올 때 어쩌냐는 그의 걱정에도
몇백킬로의 먼 길을 가야 할 그를 위해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길을 나섰습니다.

더없는 고요한 어둠에 묻힌 시골의 마을들,
세상에 깨어 있는 것은
오직 그와 나 둘 뿐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밤이 되면
이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지구가 돌아간다면
세상이 어찌 이리도 고요한 적막감 속에 잠들 수가 있을까요?

자갈이 거칠게 깔린 길을 걸어갑니다.
발 밑으로 자꾸만 자갈이 밟힙니다.
그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민이 너무 많아
무언가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보름달에게 빌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도 나는
그와 이렇게 나란히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항상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마주보는 장항선 철길처럼
우리는 먼 훗날에도 이렇게 한 길을 걸을 수 있을지
나는 걱정이 됩니다.

어느새 버스정류장이 있는 생미에 이르렀습니다.
혹시 막차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우리에게
멀리서 불빛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작별해야 합니다.

그는 나에게 어두운 길 조심해서 잘 돌아가라고 걱정합니다.
나는 그냥 "잘 가" 라고만 했습니다.
그가 버스에 올라 나를 바라봅니다.
손을 흔들 여유도 없이 버스는 잔 자갈을 튕기며
요란한 먼지만 남긴 채 멀어져 갑니다.

혼자서 돌아오는 길,
하늘의 별 만이 나의 길을 지켜줍니다.
그와 나는 먼 훗날
과연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둡고 거칠은 밤길을 혼자 걸어오며
어쩌면 우리의 젊은 날이 이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두렵고 험한 길을 잘 견디고 걸어가면
부모님과 형제가 기다리는 따뜻한 나의 집에 이를 수 있듯,
젊은 날의 힘겨운 일을 열심히 이기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그의 말대로 '꿈을 이룬 그날'이 오지 않을 까요?

삶이란 이렇게 어느날 문득 ?아오는 행복과
슬며시 다가오는 슬픔으로 엮어가는 것일까요?

지금쯤 털털거리는 버스에서 헤일 수 없는 번민에 싸여
고민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나는 그가 당당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잃지 말기를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20여년 전의 어느 늦은 가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