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받드는‘서비스 대통령’되겠습니다”
-대선 도전하는 대기업 부회장 출신 웨이터 서상록씨-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출세하고 싶고, 권력도 누리고 싶다. 흘리고 다녀도 아깝지 않을 만큼 돈도 벌기를 원한다. 그러나 궂은 일은 싫다. 체면을 따져야 되고, 실패의 쓰라림도 걱정스럽다.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대기업 부회장에서 웨이터로 탈바꿈한 서상록(徐相祿·65)씨. 주변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이기에 눈길을 끈다. 이번에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가 운영중인 서상록닷컴 사무실을 찾아 들어본 얘기는 엉뚱하면서도 솔깃했다.
“며칠 전 호텔을 그만두었습니다. 굴러가는 정치판을 보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갈이가 돼야 합니다. 손님을 떠받드는 웨이터의 자세로 ‘서비스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호텔 웨이터에서 느닷없이 대통령 자리를 넘보게 된 것을 진저리나는 정치 탓으로 돌렸다. “월드컵 축구를 응원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도 그동안 우리 정치가 짜증스런 일만 안겨주었다는 증거”라는 얘기다.
누군들 안그럴까만, 그의 정치 불신은 대단하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모두 범죄자”라고 말한다. 심지어 ‘도둑의 소굴’이니, ‘범죄 집단’이라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거침없는 얘기였기에 듣기에도 시원시원했다. 처음 인터뷰 약속 때부터 “목욕탕에서 만나자”던 그였다. “벌거벗고 자장면 시켜 먹으면서 얘기하면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당선 가능성에 대해 물었더니, “틀림없이 당선된다”는 답변이다. 최근 조사 결과 지지율이 어떻고,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고 하며 그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얘기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자 “전국 식당의 웨이터 표만 끌어모아도 1백25만표”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자신의 출마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변 건물 청소원들이 “벽보 붙이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달라”며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갈 길이 까마득하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뜻일까. “나는 떨어져도 손해볼 것이 없다”며 “나이 예순이 넘어 덤으로 인생을 사는 중”이란다. 사업을 하다가 8번이나 실패했다는 얘기도 소개했다. “내가 되든, 안되든 옳고 그른 것이 확실히 가려지는 풍토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가족들 반응이 어떤지 떠봤더니 “집 식구가 ‘제발 조용하게 살자’며 말리고 있어 설득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미 선거를 몇번 치른 경험이 있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LA 하원의원 예비선거에 4번이나 도전했다. 물론 그때마다 쓴잔을 마셨다. “2천만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쫄딱 날리고 12평 아파트로 나앉은 것도 그런 결과”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국내에서도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경산·청도 지역구에 출마했었다. 그의 나이 서른살 때였다. 지난 총선에서도 민주당으로부터 지역구 공천을 제의받았으나 뿌리쳤다. 선거 브로커들이 몰려와 “표를 몰아주겠다”며 벌리는 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과연 선거자금을 얼마나 마련해 두었는지 궁금했다. 답변은 간단했다. “기탁금만 내고 혼자 돌아다니며 유세를 벌이면 큰돈은 필요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선거운동원도 5명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반장선거쯤으로 여기는 듯한 말투다. “요즘 들어 헌법을 10번도 넘게 읽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다. 당선 여부를 떠나 대통령 선거운동을 식은죽 먹듯이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괴짜’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려서 읍사무소 사환을 거쳐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 사실부터가 유별나다. 사실은 중·고교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해 응시자격조차 없었다. 모친이 잔칫집에서 주머니에 떡국을 넣어왔으나 속옷에 달라붙어 숟가락으로 긁어먹었을 정도로 찌든 살림이었으니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일단 부딪치고 보는 특유의 기질이 그때부터 싹튼 셈이었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자 잠깐 다녀오겠다며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만 해도 그렇다. 짐이라고는 옷가지 몇개에 영어사전 한권뿐이었다니 맨손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돌뱅이 노점상부터 시작해 자수성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여유가 생기면서 부동산회사를 차려 제법 큰돈도 만졌으나 인생이 계획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하원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떨어진 것도 막대한 타격이었다. 삼미그룹과 인연이 닿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친화력이 강해 곧바로 부회장으로까지 승진도 했다. 지금까지 일로만 본다면 그는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IMF 와중에 회사가 부도사태를 맞게 되면서 결국 호텔 웨이터로 변신했으나 그것조차도 ‘화려한 변신’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경비원을 하려고 했지요. 화단도 가꾸고, 동네 꼬마들 영어도 가르치는 ‘멋진 경비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안된다는 거예요”. 종합병원 안내원, 골프장 종업원 자리도 알아봤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대형 식당 20여군데에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서야 겨우 롯데호텔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정치권에도 안면이 넓어 마당발로 통하던 그의 웨이터 취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날 야당 정치인치고 자신의 LA집에 들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니, 마냥 허풍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는 웨이터로서의 업무에도 충실하려고 애썼다. 바텐더 국가기능고시에도 합격했다. “국내 최초로 연봉 2억원을 받는 웨이터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한손에 뜨거운 접시 4개씩을 나르는 일. 남몰래 연습을 했어도 몇번이나 음식 접시를 떨어뜨렸다. 외국 손님 얼굴에 와인을 엎지른 적도 있었다. “그 사람 대단합디다. 다음날인가 자신의 생일이라고 하면서 ‘기억에 남도록 생일 파티를 열어줘서 고맙다’는 거였어요”. 웨이터로 근무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고 했다.
매일 양주 1병씩 비우던 술취미를 끊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손님들 시중을 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접시를 나르고 치우기만 하는 견습 웨이터인 ‘버스 보이’로서 웨이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테이블의 재떨이를 치우고 담배 심부름도 했다. 하지만 웨이터로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됐다. 나비 넥타이 차림 그대로 TV와 광고에도 출연했다. 그동안 불려다닌 기업체 특강만 해도 무려 900여회에 이른다. “줄잡아 60만명 정도가 내 강연을 들었을 것”이라며 다시 표계산이다.
“큰 불행이라도 생각에 따라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봉이 김선달’처럼 보일지라도 남다른 생각과 노력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그는 강조했다. “요즘 며칠 동안은 기자회견때 발표할 출마선언문을 가다듬느라 마음이 무척 바쁜 편”이라고 했다. 앞으로 선거 결과야 두고봐야겠지만, 설령 떨어진다고 해서 그가 기죽어 나자빠질 인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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