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1일 일요일 오후 12:39
11월 30일 광화문에서 있었던 효선과 미선을 위한 평화시위는 한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몸소 시위에 참석했던 한 독일인이 내게 실어달라며 자신의 글을 보내왔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며 독일의 진보 경향 신문인 <타게스차이퉁>(Tageszeitung) 등에 한국 관련 소식을 기고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칼(Christian Karl) 씨의 글을 이곳에 번역하여 싣는다. - 필자 주
한 유럽인이 바라본 효순, 미선을 위한 시위
크게 볼 때는 독점 자본주의의 비대한 성장, 작게 볼 때는 주한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시위는 그 시작에 있어서는 다른 시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시위 이전의 기조 연설에서는 때로는 정부가, 때로는 국내, 혹은 국외 자본이, 그리고 미국과 WTO, 또한 현존하는 세계의 모든 '적'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분위기를 돋우는 운동 가요 또한 빠질 수 없는 시위 문화의 일부였다. 솔직히 크게 다를 바 없군, 하는 게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종묘 공원으로 이어진 시위는 그때부터 좀 다른 인상을 주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도 시위의 순서는 다른 시위에서와 다를 바 없이 진행되었지만 뭔가 다른, 심상찮은 기미가 보였다.
당연히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는데, 후반 대열에서 쏘아댄 탓에 대부분의 최루탄은 어이없게도 전방에 서 있던 그들의 동료에게 떨어졌다.
천여명에 이르는 시위대 중에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선, 미선이 또래의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전경과 대치하여 힘겨루기 하는데 쓸데없이 힘을 소모하지 않고, 저지선 뒤쪽으로 정렬하여 서서 종로 거리를 수백 미터 점거했다. 이 순간부터 이 시위 장면은 어딘가 13년 전 내가 독일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을 연상케 했다. 수십만의 군중들이 당시 동독의 도시 라이프찌히에 운집하여 사회주의 정부를 표방하지만 이미 부패해 버린 정부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었다.
광화문 사거리에는 시위대가 최종 목적지인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전경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경들만이 그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이미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모두 촛불이 들려 있었고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자 커다란 환호성으로 우리를 맞았다.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촛불 전달 방식으로 순식간에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이 촛불을 나누어 밝힐 수 있었다.
두시간여가 지나고 전경들은 50여미터를 더 봉쇄했다. 그 뒤로 시위대가 자신들의 자리를 더 넓혀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5천여명 가량 되는 전경들이 배치되어 확성기로 떠들어댔다. 특별히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치 상황에서 양쪽 모두 몸싸움에만 그치고 더 이상의 심한 공격 수단, 곧 최루탄이나 물대포 등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맨 앞 줄에 선 전경들은 틀림없이 무척 힘들었을 게다. 그들 중 몇몇은 시위대에게 잡혀 잠시 '포로'가 되어야 했으나, 곧 다시 풀려났다. 독일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 경찰들이라면 아마도 물대포를 쏘아댔을 것이고 곤봉으로 데모대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했을 것이다.
시위가 예상보다 아주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점 외에도, 유럽인인 내가 보기에 마음 찡하게 만드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수천명의 시위대가 함께 '아리랑'을 반복해서 부를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내게 있어 약간 불편했던 상황인 “대~한민국” 연호는 다행히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역자 주: 필자는 독일 진보 성향의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독일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은 과거 나찌 독일의 경력 때문에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었던 이 시위에서, 목표지였던 미국 대사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힘과 의지가 결코 꺾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파이팅!
강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