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조용필의 노래는 특별하다.
1980년의 그 잔인한 5월이었다. 나야 조무래기 문제의 학생이었으나 한달동안 몸을 피해 있어야했다. 나를 아끼던 선생님의 아파트에 한달을 꼼짝못하고 숨어있었다. 불안과 초조는 물론이고 오랜 군사독재가 끝나나 싶었더니 다시 악몽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타야하나 하는 생각에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무엇을 읽는다는 능동적인 행동도 할수 없었다. 눈으로 TV를 보는 것도 피곤했다. 나의 하루는 '오아시스'의 여주인공 문소리처럼 종일 철저히 수동적으로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그당시 유행했던 노래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였다. 정말이지 하루에 한 열번은 나왔던 것 같다. 나는 18세의 대학생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삶과 상관없는 가사와 나의 생각과 영 줄긋기가 되지 않는 그 곡조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서서히 인생이, 세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그의 노래 'Q'도 그렇다. 방송국에 들어가 아침 방송의 진행을 맡았을 때였다. 보통 새벽 3시반에 일어나야 했다. 운전을 해서 방송국까지 한 40여분이 걸렸다. 새벽에는 모든 것이 굳어있다. 특히 발음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차안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바로 조용필의 '큐'였다. 한 3년 동안 내 일상의 시작. 내게는 '노동가요'였던 셈이다.
사회에 나와 많은 일을 겪었다. 그리고 한번도 만난 일은 없지만 조용필씨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 인해 조각조각난 순수한 대학생이 간신히 삶을 추스렸고, 그의 노래는 나의 '하루체조'였다. 언젠가 만나면 "참 고마웠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후 나는 그의 삶을 지켜봤다.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상한 가수는 불행한 법이야'라는 냉정하고, 비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고통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가 치뤄야 할 댓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가 결혼을 해서 매우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여기저기서 읽을 때 웬지 아쉬웠다. 혹시 평범한 가장이 되면 어떡하나 해서.... 그러나 시간과 더불어 더 깊어지는 그의 음악을 접하며 '그래 모든 것이 갖춰졌던 작곡가 멘델스존도 위대했어'라고 생각했다.
최근 조용필씨가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이제 나는 18세의 나라걱정만 했던 여대생도 아니고 오로지 결과에만 치열하게 파고드는 단순한 일중독자도 아니다. 나이 들어 그 아픔이 내게 세세히 전해졌다. 또한 예술가에게 세상은, 운명의 여신은 왜이리 잔인한가 생각했다. 아마도 가수 조용필은 '음악'외에는 그 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부인이 남긴 유산'에 세속적인 관심을 숨길수 없었다. 솔직히 나역시 그랬다. 그런데 조용필씨가 그 유산전부로 '심장변환자를 위한 기금'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부인은 후진을 기르고 싶어한 그를 위해 '음악학교'를 만드는데 썼으면 하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는 심장병으로 숨진 아내를 생각했다. 나는 '그들은 진실로 사랑했구나'하고 느겼다.
골퍼 존 댈리는 첫 우승상금을 전액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골프가 이런 것이죠!"
조용필은 우리에게 '예술가의 삶, 한 여성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줬다. 언젠가 그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내내 고마웠고, 당신을 존경한다"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