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그럴 줄 알았다.
당연히 허락을 안 해 주신다.
어쩐지 넘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ㅠ.ㅠ
그녀의 어머님이 반대하신다.
뭐 그렇게 급하게 결혼을 꼭 해야 하냐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늦지 않는다고 하신다.
틀린 말씀이 아니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언니분들이야 말 할 것도 없다.
그녀도 더 이상 어쩌지는 못 했다.
그렇다고 10대도 아니고 가출을 할 수도 없는 거고....ㅜ.ㅜ
젠장 안 풀리려고 하니까 학교에 나가는 일도
꼬이고 있었다.
정직원이 될 가망성은 아예 없어 보인다.
잘해야 계약연장 정도인데 그것도 여학생들이 우선 될 거란다.
....뭐 이렇게 안 된담...ㅠ.ㅠ
콱 죽어 버리고 싶다.
--------백조---------------
이 인간은 요즘 왜 이렇게 맥이 없담.
아무래도 결혼 이야기 이후로 그런 것 같다.
엄마가 너무 반대가 심하시다.
언니들까지 쌍심지를 켜고 난리들이니 아버지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못 하신다.
나도 별 수 없었다.
그에게 내년 봄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때 되면 허락해 주신대..?"
"어....어, 아마 잘 될 거야."
"봄까지는 내가 자리를 잡아야 되겠구나..."
"아니.....그래...그러는게 좋을 것 같아.
참 어떤거 같아? 정직원으로 발령 날 수 있을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어"
"언제쯤 알 수 있는데?"
"그것도 확실치가 않아.."
"뭐가 그래."
"내가 원래 그렇잖아."
"또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 그러지 말랬잖아."
"아냐 사실인데 뭐."
"정말 왜 그래? 나도 힘들단 말야!! 이 정도 각오도 못 했어?"
"했는데...막상 닥치니까 사실 좀 그렇다."
"아유!! 몰라 정말!!"
어느새 우리사이에 웃음이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의욕을 잃어선지 가게도 점점 학기초만 못했다.
월세 정도야 부담 없었지만 이것저것 빼고나니 내 인건비도 빠듯하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백수-----------
학교에 그만 두겠다고 이야길 했다.
좀 더 있으라고 하셨지만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다.
아직 그녀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생각 같아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게 해 주질 않는다.
이 곳 저 곳 닥치는 대로 입사원서를 쓰고 면접을 다녔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아무래도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그녀의 집안에서 인정을 받을 거 같아서 대기업들만 골라 원서를 넣었다.
그게 현실이니까....
줄줄이 낙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앞에서 어떤 내색도 할 수 없다는게 가슴이 아팠다.
모든게, 부족한 내 탓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게가 끝나면 그녀를 먼저 들여 보낸 후 홀로 쓴 소주를 삼켰다.
눈물이 술잔을 타고 흘렀다.
그녀를 이쯤에서 놔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마음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백조----------------
장을 봐 오는데 곱창집 아저씨가 부르신다.
"그...신랑 술 좀 그만 먹게 해."
"예?"
"요즘 새벽까지 술을 너무 많이 먹는거 같애."
금시초문이다.
"누구랑요?"
"몰라, 혼자 먹는거 같은데...아무튼 술 취해서
비틀비틀 하면서 다니는데 보기에 안쓰럽더구만."
"정말....그랬어요?"
"며칠 전엔 취해서 저기 전봇대에 기대서 자는 걸. 우리집에다
업어다 눕혔다니까."
"........."
"둘이 싸웠어?"
"아뇨...그런거 없는데."
"잘해줘, 뭔가 괴로운거 같던데....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에이구..."
도대체 얼마나 술을 먹고 다녔기에 동네에 소문이 다 났담.
화가 난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힘이 드나.
가게에 들어가니 묵묵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오빠 이리 앉아 봐. 나랑 얘기 좀 해."
"왜...."
"힘들어 죽겠어?"
"무슨 소리야?"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다녀~~ 동네에 소문이 다 났잖아.
오빠 혼자만 그렇게 힘들면 다야?"
"........"
"뭐라고 얘기 좀 해 봐, 나 들여 보내고 그렇게 퍼 마실만큼
힘든 일에 대해서!!"
"할 말 없어..."
"알잖아, 결혼 자체를 반대하는게 아니란 걸."
"알어..."
"조금만 참아 보자구. 열심히 아둥바둥 살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그렇게 술만 마셔서 되겠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얘기 해. 멀쩡한 정신으로."
"그만 해!! 정말 너까지 왜 그래!!"
"....!!!"
"내가 언제 너한테 술 마시고 헛소리 하던?
그냥 내가 나를 참을 수 없어서 마셨던 것 뿐이야.
그러니까 날 좀 내버려 둬!!"
"오빠...정말..."
"미안하다....지금, 지금은 이정도만 하자..
오늘은 그만 가 볼께. 다시 얘기하자."
그가 울고 있는 나를 두고 멀어져 갔다.
--------백수----------------
사랑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허탈하다...
그녀를 위해 결정의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하나 살아가기에도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가 않다.
그녀에게 내어주기엔 내 어깨는 너무나 허약하다.
그녀에게 전화를 해 학교 일 때문에 출장을 몇일 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그녀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빠?"
"그럼, 임마."
"언제, 언제 오는데?"
"이삼일이면 될거야. 나 빨리 나가야 돼. 전화 끊자."
더이상 얘기하면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내 맡겼다.
돌아 오는 길에 눈물이 멈출지 자신이 없다.
--------백조---------------
무언가 이상했다.
임시 계약직 사원이 출장이라니.
그의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잘 모르겠단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학교에 올라 가 봤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 그만둔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전화는 이미 꺼져 있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의 집으로 달려 갔다.
어머님이 환히 웃으며 반겨 주셨다.
요즘 무슨 일 없었냐고 여쭤 봤더니 어머니도 자세한 건 모르신단다.
그의 방에 들어가봤다.
흩어진 담배꽁초와 술병들 사이로 수십장의
이력서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력서 사진 속의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끌어 안은 채 주저 앉고 말았다.
----------백수------------
홀가분하다.
이미 마음은 정리 됐다.
행복했었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못난 사람들의 변명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내가 과욕을 부렸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함께하기엔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란 것도 깨닫게 됐다.
원망과 미움 따윈 없다.
다만 그녀가 아파할 것이 염려 된다.
하지만 그녀는 씩씩하니까 잘 이겨낼 것이다.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보고 싶다.
강물 위에서 반짝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이 쪽을 향해 뛰어 온다.
민박집 아저씨인거 같은데 무슨 일이신가..
-------백조-------------
바보 같은 사람.
혼자서 얼마나 아파했을까.
그를 놓을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그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문득 강원도의 서강이 떠 올랐다.
물론 아닐수도 있다.
아니다. 느낄 수 있다. 분명 그 곳으로 향했을 것 같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곳으로 향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할 순 없다. 절대로...
민박집 아저씨가 날 보시더니 알 것 같다는 웃음으로
말 없이 강가를 가리키셨다.
어둠속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입술을 깨문채 달려 갔다.
----------백수------------------
그녀였다...꿈이 아니라 그녀였다.
"여길 어떻게..." 하는데 찰싹 하고 그녀의 손이 날아 왔다.
다시 몇 대가 계속 날아 들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누가 니 마음대로 이러래!!"
".....이러지마."
"안돼, 오빠 맘대로 할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아니 난 아무것도 몰라"
그녀가 안겨 온다.
"널 사랑해. 하지만 거기까지 만이야."
"그런 말 하지마....제발....."
"난 결정했어...제발 이대로 받아줘."
"오빠......."
울지 않으려 했는데 그게....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백조------------
주위에 어둠 뿐이었지만
그도 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빠.....제발...."
그가 소리내어 운다.
"왜 여기까지 찾아 왔어. 모든걸 잊은채로 돌아가려 했는데..."
"오빠 날 사랑하죠...그렇죠?...
난 오빠 그 자체가 좋아서 만난 사람이예요.
오빠의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요. 만약 안 그렇게 보였다면
제가 잘못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가 숨을 몰아 쉰다.
"오빠, 알았죠? 제가 싫어진게 아니라면 전 오빠를
놓아 줄수 없어요. 다신 그런 생각 말아요. 네? 오빠..."
그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그 사람을 안아 주었다.
놓지 않을 거다.
결코.....
---------백수--------------
착한 그녀가 내게 무릎을 꿇고 빈다.
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그녀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일어나....내가 잘못했어."
"오빠 다신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녀의 얼굴에 나의 눈물이
나의 가슴에 그녀의 눈물이 흐른다.
어둠이 강물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백조-------------
민박집 아저씨가 맛있게 매운탕을 끓여 내오셨다.
이 늦가을에 왠 사랑싸움이냐고 웃음으로 타박을 주신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맥주컵에 가득 따라주신 찬 소주가 맑은 느낌으로 넘어간다.
마루에 걸터 앉아 발끝은 비에 맡긴 채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아저씨가 이런저런 삶의 단상에 관해 이야기 해 주신다.
잠시 후회할 일이면 모르지만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 같으면
행하지 말라고 하신다.
부끄러운 웃음이 나온다.
좋은 구경,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하신다.
일찍 떠나신 아주머니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란다.
하물며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그리워 하며 사는게
말이 되냐고 하신다.
거기까지 기억이 난다.
두런두런 이야기는 이어지고
쌀쌀한 강원도의 밤기운을 덮고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백수-----------------------
잠이 든 그녀에게 아저씨가 모포를 덮어 주셨다.
늘 씩씩하고 밝은 그녀에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사실은 세상이 너무 힘들어 그녀를 포기 할 마음을 먹었었다고 아저씨에게 고백했다.
말없이 웃으시더니, 사랑하냐고 물으신다.
"물론이죠." 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냥 그렇게 가라고 하신다.
함께 살면서 하는 후회가 그렇지 못 할 때의 후회보다는 행복하다고 하신다.
문득 프로스트의 시 한구절이 생각났다.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그녀를 잊으려 했던 것은 사람들이 "더" 밟은 길 이었는지 모른다.
난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을 길을 걸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삶에 '오기'로 비추어질지는 모르지만 고이 잠들어 있는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맞장구를 쳐 줄 것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아저씨가 다시 한가득 소주를 채워 주신다.
잔이 맑아 보인다.
잠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다시 고인다.
-------백조----------
모든 것이 새롭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그를 처음 좋아했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이는 걸 느꼈다.
다시 써 갈 것이다.
백지 위에 우리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채워 넣을 것이다.
그의 어깨가 따뜻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다
다시 아슴아슴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