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친정 나들이..
사이가 좋았으니 우리 삼남매를 낳으셨으련만, 왜 그리 늘 보면 서로가 옆집 아저씨, 뒷집 아줌마라도 되는 양 뻗뻗하게들 구시는지...
시원하게 냉장고에 넣어둔 캔맥주와 오징어를 싸서 아버지 손에 쥐어드리며
"아부지, 오랜만에 엄마랑 산책 좀 하고 오시지요."
"구찮다. 그냥 테레비나 보자."
"이러시면 앞으로 손자 얼굴 보기 힘듭니다."
딸의 협박에 궁시렁궁시렁 아버지는 운동화에 발 집어넣기가 무섭게 소리지르십니다.
"어이!! 빨리 나와!!"
"아버지! 어이가 뭡니까? 엄마 성함이 어입니까? 가면서 00씨! 하고 달짝지근하게 이름도 불러드리고 손도 좀 잡고 어두운데 가시면 키스도 좀 하세요."
"허어~ 그 놈 참... 야아~~ 이놈아, 니가 시방 나를 두고 가르치냐? 냅둬, 괜잖야~~"
그렇게 나간지 두 시간... 행복한 표정으로 손잡고 들어오시길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버지는 멀쩡하신데, 엄마는 시뻘개진 얼굴로 들어오신다.
"엄마 왜 그래? 아부지랑 싸웠어?"
"아,, 아냐... 나.. 잘란다.."
엄마는 화장도 못지우시고 픽 쓰러져 주무신다.
"엄마, 엄마, 일어나서 화장 지우고 주무세요. 엄마!"
"아우.. 그냥 잘래.. 괜찮아.."
멀쩡한 얼굴로 옆에 계시던 아버지..
"니 엄니 그냥 주무시게 냅두지, 왜 깨워쌌냐?"
"어, 화장 지우시라구요."
"왜?"
"아니, 화장한 채로 자면 해롭잖아요."
"뭐가?"
"화장한 채 자면 화장품 입자가 땀구멍을 막으니까, 피부가 숨을 못쉬고 노폐물 배출이 안되니까 해롭죠."
여자의 마음을 절대 모르는 아버지, 한마디 하신다.
"아니, 그럼 그렇게 해로운 화장을 왜 하냐?"
하하하... 할말이 없더군요. 화장을 왜 하냐? 여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시런 질문이었습니다요.
"어.. 저... 그게.. 아!.. 아버지, 아마 여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남녀의 결혼률이 현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입니다."
"음... 그렇구만.."
아버지가 물으시니 일단 대답한 것인데... 다시 생각해 보니, 결국 그게 정답인 듯도 싶네요. 화장에는 자기만족이란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그 누군가가 봐주지 않는다면 그래도 정말 화장을 계속 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튼... 어제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품은 채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아버지 세수하시는 사이 엄마에게 여쭤봤죠.
"어제 아버지랑 뭐 했어?"
"응... 캔맥주 하나씩 마시고 걷다가, 뭔말을 하려고 하더니, 포장마차로 데려가대"
"우와... 포싸롱에 간겨? 그래서?"
"아니, 뭔 말을 할 듯이, 할 듯이 하더니... 그냥 막 술을 마시더라구. 내 잔에도 막 따라주고. 니 아버지 속도에 맞추다 보니까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내가 팍 취해서 그냥 들어왔지.. 뭔 얘기를 할려고 그랬나? 니 아부지 혹시 바람피나? 그거 고백할려고 술을 마셨나?"
아하... 감잡았쓰~~
눈치도 빠르고 센스도 있고, 유머감각도 있는 우리 아버지.. 그러나 자식에겐 맘 약하신 우리 아버지..
딸이 엄마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줘라, 손을 잡아줘라, 키스를 해줘라, 안 그러면 손자 얼굴 못본다 하니..
의외로 그런 순간엔 고이고이 숨겨뒀던 고지식이 튀어나와...
시키는 대로는 해야겠지, 하려니 쑥쓰럽지, 기껏 맥주 한 캔 가지고는 입도 안떨어지지 소주 한 잔 마시고 용기를 좀 내보려 했는데, 어째 딴때는 술을 마시면 목소리도 높아지고 거짓말도 술술 나오고 재기 발랄 한데, 어째 마누라 이름부르며 분위기 잡자니 주량이 왠지 세져 마셔도 안취하고 마신 술도 자꾸 깨버리고 입이 안떨어 지시더라 이거죠... ㅎㅎ
양복 쫙 차려입고, 생신에 사드린 넥타이 매고 반들반들 구두 신고 출근하시는 아버지 따라 나가 차고 열어드리며 한마디 여쭈었죠.
"아부지, 각본 다 써드려도 써준대로 읽지도 못합니까?"
"야 이놈아! 니 엄니랑 나랑 30년 살았다!"
한 마디 남기고 고물차 매연 남기고 부릉하고 출발해버리시네요.
아부지! 아부지께서 엄마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압니다요. 근데요, 엄마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아버지 마음 속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아, 이건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보면.. 엄마는 아버지 속에 들어가 계시는 것 같죠.) 그러니 표현 좀 하세요.
화장을 왜 하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벌써 아버지께서 얼마나 여심을 모르는가를 보여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부지, 그저 그 시절에 태어나서 엄마 만나서 결혼할 수 있어서 다행인 줄 아셔요. 저요, 저의 신랑이 아부지처럼 군다면 당장에 쫓아냅니다요. 하지만.. 분명 두 분 사이엔 제가 절대 알수 없는 사랑이 있다는걸..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지요.
근데요, 아버지... 만약에요.. 아버지가 어디 무인도 같은데 갇혀서요.. 단 한사람에게 단 한 번만, 단 한 마디만 말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건가요?
제 생각엔.. 아마 엄마에게 "사랑해" 라고 말할 거 같은데요...
그런 순간에 그렇게도 절대적인 사람에게 절박하게 해야 할 말이라면 지금 당장 하시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한다고 말씀하세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아니, 아버지가 사랑한 최초 최후의 여인에게, 아이들의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선보고 사랑하고 아끼고 결혼까지 결심했던 곱디 고운 그 처녀, 이제는 중년이 되도록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어머니께 사랑한단 그 한마디 전하세요. 표현되지 않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표현되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그 마음 꼭 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