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26일. 며칠전 시작된 장마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어머니의 49제를 올렸습니다. 49제를 지내야 구천을 맴돌던 영혼이
비로소 이승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하지요.
산소를 다녀와서 우리부부는 누님네 식구와 함께 고향집으로 갔습니다.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 도리마을.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인 셈인데, 원래의 고향마을에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부모님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사신 동네지요. 86년 겨울에 두분이 오셨으니
17년을 사신 셈이네요. 나야 서울에 살았으니 이 동네에서 살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결혼 이후 한달에 한번은 무조건 시골집에 내려왔고
휴가란 휴가는 꼭 시골집에 와서 보냈으니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러나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니 더이상
살 사람이 없어서 얼마전 집도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고 도리마을과는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골집엘 들른 것이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몇달째 비어있던 집은 황량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마당과 뒤안에는 풀이 많이 자라있었고, 그 옛날 아버지가
쓰시던 삽과 쇠스랑이 헛간에 쓸쓸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아직 새 주인이
들어오기 전, 아직은 우리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고향집. 이것저것
세간살이가 들어있던 건조실엔 낯선 자물통이 채워져있고, 내 책들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있던 바깥 사랑방은 텅 비어서 마치 커다란 동굴을
연상케 했습니다. 신혼시절 고향집엘 내려오면 그 방에서 우리부부가
묵었고 세월이 흐르고난 후에는 우리 네식구가 잠을 자던 그리운 방.
겨울이면 우리가 내려오기 하루전부터 아버지는 사랑방에 군불을 지폈고
그래도 우풍이 심해서 춥다며 전기난로를 방에 넣어주셨지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그 방에서 잘 때 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찌감치
일어나 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셨습니다. 서울서는 맡아보지 못한
매캐한 군불연기에 녀석들은 코를 킁킁거렸고, 아버지는 잔기침으로
응답하셨지요. 자식들이 자고있는 방에 군불을 때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셨을까요?
그러나 이제 그 따스한 군불을 지피던 아궁이는 더이상 군불이 지펴지지
않습니다. 텅 비어있는 아궁이가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뒤안에는 월남아카시아나무가 어김없이 분홍색 꽃을 피우고 서있습니다.
고향마을 ''매새''에 살 때 우물곁에 서있던 그 나무. 유난히 그 나무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도리마을로 이사를 와서도 그 나무를 캐다 심으셨던
아버지. 건조실 뒤안 텃밭에 심어져있는 몇포기의 고추가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여름이면 물에 밥을 말아서, 텃밭에서 딴 고추를 고추장에 푹푹
찍어 먹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상추쌈은 또 얼마나 맛있었나요?
우물가에는 장독대가 있고, 그 위에는 아직 어머니의 장독이 여나무개
있습니다. 이모네가 퍼가고 여동생들이 퍼가고 누나네가 퍼가고
서울 우리집에서 퍼갔지만, 아직 장독대에는 어머니가 담근 고추장과
된장과 간장이 남아 있습니다. 사먹는 된장은 맛이 없다며 며느리에게
꼭 된장을 담가주시던 어머니. 이제 그 며느리에게는 더이상 된장을
담가줄 시어머니가 안계십니다. 그녀에게 시어머니의 사랑을 전해주던
장독대도 이제 새 주인을 맞을 겁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장독대에 걸터앉아 봅니다. 어머니가 현관 봉당에
걸터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같습니다. 흘러간 세월이 장독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납니다. 여름이면 우물가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미역을 감곤 했습니다. 큰 다라에 물을 받아놓고 수진이와 광일이
그리고 조카들(성희, 주희, 현구)이 어울려 물장구를 치며 놀았지요.
그러다가 밭에서 돌아오신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는 등목을 해드렸지요.
당신은 아내보다는 며느리한테 등목받는 걸 은근히 좋아하셨지요.
눈 앞에서 아내가 아버지께 등목을 해드리는 게 보이는 것같습니다.
사랑방 벽에 매달려있는 툇마루가 보입니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몰라도
한쪽 다리가 부러져나간채 벽에 기대선 툇마루. 우리가 시골집엘 내려
올 때면 여동생네 가족과 누나네 가족이 모여서 그 툇마루에서 삼겹살
파티를 즐기곤했습니다. 매형이나 매제와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나는
정말 고향의 푸근한 정취에 흠뻑 빠지곤 했지요. 서울생활에서는
맛보기 힘든, 따스하고 아늑하며 뿌듯한 정취. 그건 바로 고향이 주는
한없는 편안함이었겠지요. 여름밤이면 그 툇마루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시절.
툇마루는 그리운 시절을 담고서 언제까지나 거기에 그렇게 기대서있겠지요.
잡초가 듬성듬성한 마당엔 어머니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을겁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발자국은 마당에 분명히 있습니다.
중풍으로 몸져 눕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그 마당을 오갔을 어머니.
언젠가 문수암 보살을 만나러갔다가 이픈 다리로 몇번씩 쉬기를 반복하며
30분 이상을 걸어오셨던 어머니. 몇발자국 걷다가 쉬고 몇발자국 걷다
쉬면서 경촌마을을 다녀오셨던 어머니. 항상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당신. 말년엔 아예 집밖 걸음을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지내셨던 어머니. 이제 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셨겠지요.
이제 우리는 도리마을 시골집과 영원히 이별해야 합니다.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남들이 사는 낯선 집.
세월이 흘러도, 그러나 우리가 남겼던 가족들과의 그리운 역사는
이 집에 남아있겠지요. 먼 훗날 이 집을 다시 찾아왔을 때
그리운 그 옛날의 전설은 우리의 가슴 속에서 다시 살아나겠지요?
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던 아버지의 성냥켜는 소리와
아들을 위해 감자찌개를 끓이던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그곳에는 전설처럼 남아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