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전 반정군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끌여내려진 광해군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지하에서 눈을 떳습니다.
광해군과 노무현 ,,
어찌그리 역사는 순환을 하는지..
긴글 이지만 인내를 갖고 그의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4백년 전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점이 무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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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 속에서 광해군이라 불리워지는 사람이다.
조선 왕조 14대 임금 선조의 아들이요, 16대 임금 인조의 숙부이되 '祖'나 '宗'의 묘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때 이름 광해군으로서만 영원히 기억되는 불운한 왕이다.
폭군에 패륜아라는 오명을 쓴채 반정군에 의해(인조반정) 왕위에서 끌어내려졌기 때문이다.
나의 계모이자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인목대비는 반정 후 폐위된 내 죄악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자잘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더라도 나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를 죽였으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했다는 것이고,
과도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
그리고 결정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폐모살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허물이다.
당쟁의 와중에서 나는 나보다 아홉살 어린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켰고 그 아버지를 죽였다.
또 내가 지시한 일은 아니지만 아홉살 난 영창대군이 펄펄 끓는 방 안에서 쪄 죽임을 당했으니 실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도다.
그러나 이를 일컬어 패륜이라 할라치면 조선왕조 스물 일곱 임금 가운데 온전한 자가 누구랴.
내 후임자 인조만 해도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까지 다 죽여 없앴는데.....
토목공사 건 역시 그렇다. 전란통에 궁궐도 관청도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나라에서 국왕으로서 그렇게 못할 일이었을까.
그랬다고 치고 넘어가자. 사실 가장 내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번째였다.
"再造之恩(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임진왜란이 터진 직후 세자가 되었고 압록강 넘어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던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최전방을 누비면서 적군에 맞섰다.
그 전쟁의 막전과 막후를 어떤 조정의 신하보다도 더 상세히 알며, 우리를 '도우러 온' 명나라 군의 활약(?) 역시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버지 선조는 북쪽을 감히 등지고 앉지도 않을만큼 명의 은혜에 감사했고 어떤 얼빠진 선비는 "중국인들은 우리 조선 인민의 아버지"라고까지 했다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를 도와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네 땅에서 싸우기 싫었을 뿐이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그들 나름의 교훈을 따랐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왕위에 있던 1616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에게 2만명의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거드름을 피우던 인물이다.
그 옛날 금나라 시절부터 "여진족이 1만이면 천하가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중국인들이 두려워해 마지않던 여진족이 드디어 통일 국가를 세운 것이다.
나는 직감했다. 저 무능하고 썩어빠진 명나라가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흥 후금의 철기병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아니나다르랴,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가 임진년에 왜군한테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만주지역을 상실해 버린 명나라는 우리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말이 청이지 압력 이었다..
훗날..너희도 멀리 아라비아로 군대를 파견하라고 압력을 받았다고 들었다만은..
하여튼...명나라는 '再造之恩'을 갚으라는 것이다. 너희 나라 왕이 압록강까지 쫓겨 왔을 때 그를 도와 나라를 회복한 것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너희는 낙동강 까지 쫓겨간적 이있었다지?
내 신하들, 그리고 재야의 말많은 선비들, 그리고 덩달아 백성들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뼈에 새기고들 있었다.
"중국인들은 모두 우리 조선인들의 아버지"이며 "명나라의 은혜를 잊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행위"라는 것이 나의 신민들의 상식이었으며 누가 여기에 딴지라도 걸 라치면 천하의 난신적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 가까이 되었으되 그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벽은 굳건했고, 명나라 사신들이 와서 수만냥의 은을 긁어가도, 그들이 어떤 횡포를 부려도, 우리 신민들은 얌전했다.
내가 구원병 파견을 거절하고 있을 때 아마 철없는 유생들이나 머리 허연 권신들이나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여 우리 임금님의 마음을 돌려 명나라를 돕게 하옵소서."
아둔패기들이여, 사대에 눈 먼 장님들이여. 나쁜 피는 물려받기도 쉬운 법이려니,
너희들 대에도 그런 인간들은 있더구나
갈라진 너희 나라의 반쪽 (북한)과 명나라같은 대국 미국 사이를 ‘중재’해 보려는 이들에게 ‘색깔이 이상하다’는 욕설을 내뱉는 자를 보았다.
이제는 혀를 차려해도 찰 혀가 없느니....
우여곡절 끝에 1만여 명의 명나라 구원병이 편성되었다.
너희도 아라비아 나라에 3천 장정을 보낸다지?
1만명 하니 별 것 아닌 것 같으냐? 그것은 조선 전체의 장정들을 쥐어짠 병력이었다.
평안도 3천5백, 전라도 2천5백, 황해도, 충청도 각 2천 등 전국 각지의 생때같은 장정들이 압록강변 평안도 창성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이들이 “이미 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 (광해군일기) 창을 제대로 쥘 줄도 모르는 어린 양 같은 군대를 피에 굶주린 철기 앞에 내몰면서 어찌 임금으로서의 자책이 없었겠느냐.
구원군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명나라 장수들의 명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우리병사 들이 죽지 않는 전투만 되도록 하라.”
이 말을 두고도 피끓는 유생들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망발”이라고 펄펄 뛰었겠으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후금에까지 비밀리에 손을 댔다.
정확한 진상은 나만이 알고 있고 너희들 대에까지도 설이 분분한 이야기지만, 나는 후금과 통하고 있었다.
누대의 원수, 우리나라 북변을 승냥이처럼 위협하던 적국 후금과 나는 ‘밀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냐고?
명나라의 10만 대군이 전멸했던 사르허 전투에서 우리 군대는 후금군의 철기병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1만 조선 장정들이 떼죽음을 당할 시점에 후금군이 먼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그들은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해는 내가 시킨 것이었다만.
강홍립의 항복이 알려지자, 조정은 벌집 쑤신 듯했다.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또 한 번 군을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주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까짓거 전쟁 한 번 합시다”
라고 너희대의 국회의원이란 관직의 인물도 조선반도 에서 전쟁 한번 하자고 기염을 토했다지.
나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입으로 전쟁을 하는 무리들, 그 입에 내둘려 마침내 전쟁이라도 터지면 누구보다도 압록강변으로, 지리산으로, 너희들 시대라면 외국으로 비행기 타고 도망갈 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의 식솔들 중 군대에서 칼 잡고 있는 놈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너희 대나 나의 때에나 군대란 어둠의 자식들의 집단이었느니.....
대의명분에 불타오르는 신하들은 후금 진영에 붙들린 강홍립이 비밀리에 보내온 밀서를 접수하는 것조차 “적과의 밀통”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에게 강홍립은 적과 내통한 쳐죽일 놈이었고 그를 은근히 옹호하는 나는 제 구실을 못하는 군주였다. 마침내 나는 폭발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고삐를 죄어 한결같이 하여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치 못하면서 밖으로는 큰소리만 친다.
신하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전부 압록강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참으로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무사들이 서쪽 변방 (후금과의 국경)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나오느니 헛소리 뿐이로다...........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으로 나라를 망칠 것이다.”
(광해군 13년 6월6일 광해군 일기 중, 서기로는 1621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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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은 점차 신하들에게 전달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충정을 이해하는 대신 내 발밑을 파기 시작했다.
폐모살제라는 빌미로 이미 패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데다 “재조지은”을 잊은 배은망덕한 임금이라는 빌미가 덧붙여졌고, 이이첨 등 내 측신들인 대북파의 부패는 그 빌미를 명분으로 축적해 주었다.
너희들도 대통령 측근의 일부의 비리로 대통령을 탄핵 한다고 한다지?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비웃는” 정치고립 상황은 내 말년 내내 지속되었고 마침내 운명의 날, 1623년 3월 12일 반정군이 창덕궁을 들이쳤다.
너희대에는 한나라당이 이를갈고 민주당이 비웃으며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려 한다고 들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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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권좌에서 내동댕이 쳐졌다.
그리고 왕자 때 이름 “광해군”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이후 조선 후기 내내 나의 이름은 폭군과 혼군과 어두운 임금의 대명사였다.
각종 기록에서 폭군이라 함은 나보다 열배는 더 포악했던 연산이 아니라, 나를 일컬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선을 누비며 백성들을 묶어세웠던 나는
완강하기 이를데없는 벼슬아치들과 기득권 상인들의 발악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했던개혁 정책과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외교적 노력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아내와 아들내외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다.
유배때 나를 수행한 병졸들은 안방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나는 건넌방에서 재웠다.
심지어 계집종 까지도 늙은 것,, 운운하며 욕을 보였고 수모를 견디다 못한 아내는 홧병으로 죽었고
아들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며느리는 그 망을 보아 주다가 세자가 다시 잡혀오는것 을 보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치욕까지 겪고
세자의 자결소식을 접하고 그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처참한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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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일 점 후회는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한 나라의 왕으로서 내가 책임진 억조창생의 안위를 위하여 사력을 다해 정적들과 싸웠고 명나라를 구슬렀고 후금의 철기병을 달랬다.
그래서 불구대천의 적과 ‘밀통’하기도 했고 그것이 “天理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 위로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였을지는 모르나
나는 그것이 조선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었음을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내 어머니의 묘 부근에 나동그라져 있다.
내 형 임해군의 묘도 지척에 있어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지만 나는 그럴 후손도 없어 수백년 동안 제삿밥 얻어먹은 적조차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던 것 뿐일지니.
역사와 너희 백성들의 평가가 어찌 이뤄지든 나는 당시의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을지니.....
그러나 그 최선을 다한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조차 나의 책임 이었을지니.....
나는 그렇게 담담히 돌아눕는다.
나의 잠을 깨운 시끄러운 소음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넋두리를 남기고.......
“후손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너희 대통령이 권좌에서 쫓겨날정도로 그런 대역 죄인 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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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가 `오래전에 인터넷에서 읽은글을 기초로 현재의 탄핵정국과 연계시켜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재구성 한글 입니다.
후에 청태종이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고 공언하자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강화도에유배되어있던그를 제주도로 보내어 그는 제주도에서 유배18년만인 1641년 67세의 나이로 지켜보는이 없이 쓸쓸하게 한많은 삶을 마감 지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 27대 실록’ 중 광해군과 연산군만 폭군 으로낙인 찍혀‘실록’이란 명칭 없이 ‘일기’라 칭 함니다.
폭군으로 낙인찍힌 불운의 왕 이지만 안으로는 전란으로 파탄난 조선을 각종 개혁조치로민생안정에 강력히 공을 들엿고 밖으론 철저한 국익위주의 실리외교 노선을 경주 하며 부국강병을 길을 모색하였던불운한 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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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무현 대통령이 광해군처럼 반정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 내려질 운명 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저 폭거를 저지해야 합니다.
저지하는 방법은.. 반정의 무리들을 이번 총선에서 표로서 심판 하는것 입니다.
저 오만방자한 무리들에게 국민의 힘을 보여 줍시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