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사 사회부 차장인 박이은경씨(35·원래는 이은경인데, 부모성을 같이 쓰면서 어머니 성을 앞에 두었다)는 97년 4월 서른셋에 한 살 위인 송경덕씨(제일화재 근무)와 결혼했다. 결혼 후 첫 친정 나들이에서 은경씨는 뜬금없이 “엄마, 나 교통사고라도 나서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은경씨는 결혼 후 연거푸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생신을 치렀는데, 기자생활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하루는 큰동서와 장을 봤고, 생신 당일엔 십여가지가 넘는 채소를 다듬고 씻고 채썰며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송경덕씨는 오랜만에 모인 자기 형제들과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엌일에 익숙지 않은 은경씨는 손이 빠른 동서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여자들만 부엌에서 동동거려야 하는데 모멸감을 느꼈다.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은경씨는 “수돗물이 흐를 때 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면서 칼질할 때의 섬뜩함이 문득문득 되살아나 몹시도 힘들게 한다”며 “추석이 가까워 오니까 그 일이 반복될까봐 지긋지긋해서 입원이라도 해서 회피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박형옥씨(62)는 사위를 향해 서슴없이 말했다. “아내의 고통을 모르는 자네는 남편 될 자격이 없네.” 그리고 딸에겐 “이제는 병원에 입원하다는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명절이나 생신 때도 다시는 시집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말아라. 오히려 남편과 둘이서 여행을 떠나 둘의 가정과 서로 나누어야 할 생각들을 함께 하는 기회를 가져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대담한 친정어머니가 또 있을까? 보통 친정 어머니라면 “여자가 결혼하면 다 그런 거란다. 그렇지만 참고 시부모에게 잘 해라. 그게 다 너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위패 내다버리고 제사 거부했던 어머니
박형옥씨의 굳건한 여성주의는 친정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내력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신의주의 부잣집 외동딸이었던 박형옥씨의 어머니는 대동강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압록강에서 수영을 즐길 정도로 그 시대로선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통 유교 집안에서 자라나 효자상까지 탄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결혼 후 많은 갈등을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제사 지내기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어머니는 전통적인 유교풍습에 따른 시집의 수많은 제사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제사때가 돌아오면 앓아눕는 것으로 미약한 항거를 하던 어머니는 어느날 위패를 내다버리며 제사를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당신과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제사를 지낼 수 없어요”하고 선언했다.
몹시 화가 난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누이집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어머니는 아이들을 찾지 않았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결국 다급해진 아버지가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요즘 여성들도 감히 못하는 일은 50여년 전에 그렇게 당당하게 해낸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땐가 그랬어요. 그땐 그저 고모네 가서 사촌들과 노는 게 좋아서 그렇게 심각한 일인지 몰랐죠. 나중에 엄마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듣고 더 놀랐어요. ‘그때 아버지와 너희들이 떠나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안해지더구나’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물론 아버지의 이해가 있었으니까 가능했겠죠. 두분이 싸우기도 많이 싸우셨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끔찍이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엄마의 당당함에 대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 엄마는 자식들이 여름방학을 맞으면 가까운 친척에게 집안살림을 맡기고 혼자 여승들만 기거하는 삼각산 승가사에 가시곤 했어요. 아버지가 맏이인데다 가장 여유있는 생활을 해서 당시 집에는 늘 친척들이 모여들곤 했는데, 스무명 가까운 식객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빠져나와 휴가를 즐기신 거죠. 동생과 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과 과일을 승가사로 날라야 했어요.”
지금도 힘들 텐데 당시 주부가 어떻게 가족들을 남겨둔 채 집을 떠날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그런 당당함의 대가로 박형옥씨 친정어머니도 네명이나 되는 시누이들에게 욕 깨나 얻어 먹었다고 한다.
“고구려 여인들이 대단했대요.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말탄 여자들이 고구려 여자들입니다. 어머니가 그런 곳에서 자랐고, 저도 그런 어머니 밑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겠죠. 어디 하루아침에 되었겠어요.”
1962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박형옥씨는 남편의 사업이 힘들기 전까진 지극히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다. 사업 실패로 많은 빚을 졌지만 남편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업 재기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친정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고통을 주면서 괴로웠던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박형옥씨는 이혼이라는 방패를 들고 끊임없이 싸웠으나 남편은 마이동풍이었다.
1983년 발족된 ‘여성의 전화’ 1기 자원 전화상담자로 매맞는 아내들의 상담을 하면서 박형옥씨는 자신도 매맞는 아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고 정신적인 폭력도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그랬다. 더 이상 아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핑계삼아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양보해선 안된다고 다짐한 그는 87년 쉰이 넘은 나이에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들어가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86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이제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고, 그리고 딸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젠 착한 며느리 안할래요
첫 친정 나들이에서 엄마에게 봇물처럼 서러움을 털어놓았던 박이은경씨는 그날 밤 남편과 크게 싸웠다. 남편은 시부모 생신 준비때 그토록 모멸감과 고통을 느꼈다면 먼저 남편인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게 순서지 장모 앞에서 자신과 시집의 체면을 일방적으로 구겨버리느냐고 화를 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날 부부싸움은 은경씨의 판정승이었다.
“칼질할 때마다 손가락이 뭉텅 잘려나가는 듯한 오싹한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느꼈던 고통보다 관념뿐인 당신의 자존심이 더 소중하냐’고 말 그대로 악을 썼어요. 남편에게 시부모님 생신날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제가 느꼈던 고통의 실체가 정확히 잡히는 듯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 남편의 눈에도 물기가 어리는 것을 봤고, 그가 나의 고통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싸움은 막을 내렸죠.”
박이은경씨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결혼에 대해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개는 이런 내용이었다.
‘아무리 페미니스트 신문사 기자라고 할지라도 한국에 사는 여성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평소에 자기중심적이고 다소 개인적으로 보이는 점이 시집 어른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평소보다 3배 이상 노력해야 한다, 시집에서 무엇인가를 받기보다 먼저 베풀어야 한다, 결국 너의 운명을 좌우할 남편 가족들이다…’
주위사람들의 충고를 열심히 경청했던 은경씨는 처음에는 ‘착한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를 썼다. 적당히 애교섞인 안부전화는 필수였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시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자 노력했고, 20여년 동안 다니던 교회도 시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로 옮겨서 1년 동안 다녔다. 시집 식구 생일날은 일일이 카드와 선물을 챙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짐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하나하면 두 개 요구하고, 두 개 하면 세 개 요구하고, 거기다 딴엔 최선을 다해도 며느리의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결혼 전엔 없었던 자기억압이 생기고, 금 하나 밟으면 술래가 되어버리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놀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는 조바심과 위기감이 들었어요.”
시집은 차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지만, 일주일에 3일은 취재하느라 뛰어다니고, 3일은 마감작업으로 밤 11시는 돼야 집에 들어오는 은경씨로서는 사실 남편의 식사를 챙기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간신히 틈을 내서 시집에 찾아가면 뒷설거지는 늘 은경씨 차지였다.
시집에만 가면 하녀가 된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을 느끼는 게 싫어서 이제 은경씨는 시집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아웃사이더로 살기로 했다.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박이은경씨와 달리 박형옥씨는 처음부터 딸에게 “여자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집엔 일개 며느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몰개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확신과 거기서 싸워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심지어 결혼전 예비사위에게 “난 자네가 내 딸을 여성이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네. 내가 내 딸을 이제까지 그렇게 키워왔으니까”하고 못을 박았다.
결혼 후 두 번째로 시아버지 생신을 맞았을 때 박이은경씨는 여름휴가를 이용해 유럽여행중이었다. 그리고 한달 후 시어머니 생신이 돌아왔다.
박이은경씨의 큰동서도 직장여성이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생신은 토요일에 치르기로 했는데, 그날 은경씨는 저녁까지 해야 할 취재가 있었고, 큰동서는 직장에서 연수가 있었다. 그래서 은경씨는 각 가정에서 돈을 조금씩 모아 근처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거나 각 가정에서 대표적인 음식을 해오고, 시집에선 밥과 커피 정도만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두가지를 다 거절했다.
그날 시집에 오기 전에 은경씨는 남편에게 정형화된 삶의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남편식구들의 답답함과 며느리의 희생이 있더라도 경제적으로 절약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이기주의에 대해 불평을 쏟아놓으며 ‘내 손에 물 한방울 묻으면 당신 손에도 역시 같은 물을 묻혀야 한다’고 선언하고 왔다.
남편은 부엌에 들어와서 음식 만드는 것을 거들진 못했지만 예전과 달리 자기 식구들과 속 편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나고 설거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은경씨 차지가 되었을 때 은경씨는 남편을 불렀다. 아들이 설거지하는 걸 보고 시어머니는 뒤에서 안절부절하며 서성였지만 은경씨 부부는 함께 설거지를 했다.
힘든 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결혼한 여자라면 시집 문제로 갈등을 느낄 때 남편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다행히 박이은경씨 남편 송경덕씨는 결혼전 장모가 강조했듯이 은경씨를 여자, 아내,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대하려고 노력했다.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은경씨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삶을 발전시키려는 열정도 강하고, 자신의 일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
시집 문제에 대해서도 결혼 후 1년간 시집식구들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진정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가서 일할 것 없다고 ‘해방’을 선언했다.
“결혼전에도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를 무서워하는데, 남편은 그런 게 없었어요. 남편을 이해시키는 제 전략은 내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리 유치한 일이라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외로 많은 여자들이 남편에게 자신의 힘든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더라고요. 속좁은 여자로 비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다 이야기해요. 그리고 이해를 못하면 몇번이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그걸 짜증 안 내고 받아주니까 고맙죠. 이젠 제가 어떤 상황에서 기분 나빠하는지, 자존심 상해하는지 아니까 최대한 중재자 역할을 해요.”
남편의 지지 덕분에 시어머니 생신 후 가장 큰 행사인 추석때 박이은경씨는 남편과 함께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전에 시집에 추석에 쓸 고깃거리를 전하러 갔을 때 여행을 간다고 이야기하는 남편 뒤에서 은경씨는 애매모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기간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손윗동서는 꿈도 못 꿀 일인데’ 하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의지로 옳다고 생각해 택한 일이고, 형님에겐 형님의 당위성이 있으니 서로의 영역에 대해 간섭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전 의무도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2월 설날에도 은경씨는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때 큰동서와 갈등이 있었다. 은경씨의 큰동서는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믿어 제사도 없고 일년에 기껏 네댓 번 정도만 고 생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시부모님이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착한 며느리, 아니 우리 사회의 보통 며느리다.
그러나 박이은경씨는 다른 집안에 비해 훨씬 가벼운 책무가 매번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준다면 ‘기껏해야’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이 따르는 근본원인은 양에 있는 게 아니라 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날 여행 간다고 한바탕 풍파가 있은 후 얼마전 시아버지 생신이 돌아왔을 때 큰동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때 은경씨는 피곤에 절어 자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송경덕씨는 “왜 만날 똑같은 방식을 고집하느냐. 은경이는 할 수 없는데, 못하는 걸 자꾸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전적으로 은경씨 입장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남편이 나선 덕에 마침내 시부모 생신을 차리는 방식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집에서 몇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시집에 모여서 같이 먹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누이들은 빠지고 며느리들만 음식 준비를 했다. 은경씨네는 고기와 샐러드를 준비했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백화점에서 고기 재놓은 것 사다가 양념을 해서 가져갔어요. 그리고 굽는 것은 남편이 도 맡아서 했고, 설거지는 같이 하고 왔어요.”
그 다음에 돌아온 시어머니 생신도 같은 방식으로 치렀다. 이번 추석에도 여행을 떠날지는 아직 확실하게 결정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말한다.
“항상 명절때마다 여행가고 싶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러나 명절을 지내는 방식이 지금대로 라면 여행가는 걸 택할 수밖에 없죠. 직장 다니는 사람은 사실 명절때 아니면 쉴 수 없는데, 여자는 직장생활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명절때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부당한 거죠. 그것도 즐겁지 않은 기분으로 말예요. 앞으로 음식은 각자 집에서 만들어 가고, 먹고 난 후 설거지는 남자들이 하는 명절 지내는 방식이 되도록 노력할 겁니다. 이제 명절 지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해요.”
이렇게 박이은경씨는 ‘우여곡절 끝에’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우리 주위에는 머리는 페미니즘으로 굳게 무장되어 있으면서도 몸이 안 따라가 자기비하를 느끼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한국적 현실’을 들먹이며 온건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자위하며 산다. 박이은경씨도 처음에는 그 말에 솔깃했지만 겪어본 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시집에서 보내는 명절이 기다려지는 세상을 만들자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합니다. 그렇다면 끝간 데 없이 고통에 고통을 당해본 후에 그것이 고통이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요? 우리의 가부장적인 관습이 너무 굳건해서, 시집 식구들 개개인이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며느리의 인권을 너무도 침해하고 있어요.”
이런 생각들을 담아 박형옥씨와 박이은경씨 모녀는 최근 책을 하나 냈다. 제목은 <사위에게 주는 요리책>. 그러나 몇 년 전 나왔던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처럼 사위에게 쥐어주며 ‘내 딸을 위해 요리를 하라’고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아직도 요리를 여자만 하는 일, 며느리만 하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이자 호소문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
책에서 시집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은 박이은경씨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검열을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때 너무 바빠서 ‘이런 내용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칠 틈이 없었어요. 아마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책을 읽고나면 좀 불편할 거예요.”
송경덕씨는 자신과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개되는데 즐거울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도 아내의 책 때문에 찾아오는 기자들의 취재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서점 주인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이 벌어졌대요. 싫어하는 이유는 에고이스트라는 거죠. 엄마는 왕비병이고 저는 공주병이래요. 1년에 시집에 가서 몇번이나 일을 한다고 불평을 하느냐는 거죠. 그런 반응을 접하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자가 불편한 걸 이야기하는 걸 못 받아들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금기를 건드린 거죠.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가족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는 겁니다. 며느리와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나온 게 처음일 거예요. 제 친구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다며 이번 추석에 시집에 선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박이은경씨는 책이 나온 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다 이혼당하지 않느냐는 걱정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박형옥씨도 “딸을 좀 달래야지. 친정엄마가 더 나서면 어떻게 하느냐”는 핀잔과 함께 “참고 살아야 복이 온다”는 조언을 들었다. 박형옥씨는 그 복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박이은경씨는 이 땅의 딸들에게서 ‘시집살이’라는 종속적인 단어가 사라지려면 극성스럽고 이기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자신의 어머니같은 친청엄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야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각자의 입장을 조율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박형옥씨는 여성의 전화 상담을 하면서 느낀 것이라며 시집갈등은 구타관계와 똑같다고 말한다.
“순종하고 비위를 맞추면 맞출수록 남자들이 더 때립니다. 시집살이도 마찬가지예요. 잘 하면 잘 할수록 더 잘 하길 요구당하는 게 시집살이입니다. 며느리들이 모두 시집에 가서 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게 아녜요. 이 세상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시어머니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며느리는 되지 말자는 거죠.”
그러면서 무엇보다 시어머니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일년에 몇 번 행사때만 시집에 가는 것도 기꺼운 마음으로 가는 이가 드뭅니다. 왜 그러겠어요? 어쩌다 시집에 가면 남편은 자기 형제자매들과 재미있게 노는데, 자신들은 익숙지도 않은 ‘남의 부엌’에서 음식장만과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지겹고 싫다는 감정이 들지 않겠어요? 모처럼 와서 하루나 이틀 머물다갈 며느리를 부엌으로 몰아서 정신없이 일을 시켜야 할까요? 지혜로운 시어머니라면 자신의 손맛을 발휘한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서 며느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세상에 그런 시어머니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박형옥씨의 시어머니가 그랬다. 박형옥씨의 시집은 충남 공주 근처의 대단한 부잣집이었는데, 홀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수양딸인 시누이는 박형옥씨네가 내려간다는 기별을 하면 동구밖까지 나와 기다렸고, 손끝 하나 까딱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편안히 지내다 가게 했다.
“제가 갈비 좋아한다고 갈비 한짝을 통째로 사서 직접 토막을 내서 숯불에 구워주셨어요. 명절마다 맛본 그 갈비맛을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어요.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형님의 솜씨도 솜씨지만 근본적으로는 저를 그토록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하나라도 더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이고자 했던 정성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추석때만 되면 그때가 그리워요.”
박형옥씨는 드물다 못해 아주 희귀한 경우지만, 이땅의 며느리들이 박형옥씨처럼 시집에서 보낸 명절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올 가을 외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를 맞을 예정인 박형옥씨는 시어머니가 보여주었던 사랑을 며느리에게 그대로 베풀 생각이다. 언젠가는 시집살이라는 굴욕적인 단어도 사라지고, 며느리들이 시집에서 보내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릴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