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웃기는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주민등록표 상에 법적으로 분명히 미혼 즉 처녀라고 기재되어있는 사람이라도 진짜 처녀 즉 동정녀가 아닐 수도 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어떻게 마리아의 속사정을 그리 잘 알며, 심지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 속에 천사가 현몽하여 일러준 말까지 다 소상히 알 수 있을까?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만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흔히 우리 자신은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 비유된다.
이것은 비유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영적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 신부라는 말을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흙'이라는 말로 할 수 있다. 흙과 신부는 다 바깥에서부터 씨앗을 받아 무언가를 생산하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이 처녀(신부)라고 해도 다 처녀가 아니라 처녀도 처녀 나름이요, 자신이 흙이라고 해도 다 흙이 아니라 흙도 흙 나름이라는 점이다.
반드시 순결한 흙, 순결한 처녀라야만 순결한 것 즉 그리스도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복음서의 필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이 순결한 흙, 순결한 신부인가?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실재를 표현하고자 한 비유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더 나아가 보자. 만약 우리가 그 순결한 상태를 알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피조물이므로,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 순결한 상태를 알 수 없으며 그렇게 되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순결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주신 유일한 도구는 바로 우리의 생각인데, 우리는 그 생각으로서 순결한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엇이 순결하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우리는 순결한 상태는 결코 알 수 없고 순결하지 않은 상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순결함을 추구하는 자는 무엇이 순결하지 않은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을 흙이나 신부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흙이나 신부인 우리가 순결한 상태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순결한 상태인지는 모르고 다만 무엇이 순결하지 않은 상태인지만 알 수 있다.
무엇이 순결하지 않은 상태인가?
만약 흙이 자신이 흙인줄 모르고 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순결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신부가 자신이 신부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의 힘 만으로 자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순결하지 않은 것이다.
즉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순결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는데에 우리는 '동일시'라는 용어를 쓴다.
예컨데 흙이 자신을 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흙이 자신을 돌로 동일시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왜 동일시라는 용어를 쓸 수 밖에 없는가라는 점을 한번 고찰해 보자.
이것은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우리자신까지 포함해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아는 자'의 성품을 필요로 한다.
전에 한번 써먹었지만, 미녀와 호랑이라는 예를 보자.
미녀는 제 스스로 미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자'의 눈에 미녀로 보일 때만 미녀가 되어 키스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호랑이의 경우에는 그 '아는 자'의 눈에 먹이로 보이므로 그녀는 잡아먹힌다.
이 말은 결국 미녀가 미녀가 되는가 또는 먹이가 되는가는,그 여자 자신이 아니라 누구인가의 '아는 자'에게 달려있다는 말이다.
이 '아는 자', '앎'의 성품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 '앎'의 성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면 (또는 믿으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 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면 (또는 믿으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물론 진심으로 믿을때에만 그렇다.
흙이란 비유는 또 다른 표현으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표현은 나를,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흙과 같은 수동성을 말하고 있으며, 자신을 그 어느 것과도 동일시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제대로 실재가 된 상태는 아무런 자기동일시가 없을 때 만이다.
말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그 무언가로 여기고 있다면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실재가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불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살먹은 어린애도 말하기는 쉽지만, 여든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이 역시 진리를 들어 지식적으로 알고있는 사람과 그 진리가 자신의 실재가 된 사람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에도 그 사람 자신의 자각의 깊이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정도 나름이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나는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해보라.
만약 거기에 어떤 대답이 나온다면 당신은 그 대답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여전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이 가리키는 그것이다.
진리의 여정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반발하고 덤벼드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진리의 말씀이 그가 자기
자신이라고 동일시 하고 있는 아담 즉 그 자신의 선, 의(옳음), 주장, 뜻, 의지등이 진리의 빛 아래 노출되어 그 존립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던진 꼴이 되며, 물론 그 사람들 자신은 자신의 그러함을 결코 모른다. 예수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서 골고다로 끌려갔다.
그 다음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적인 수준으로만 이해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진리를 알았다는 희열과 자만심에서 다른 사람에게 입에 거품을 물고 그것을 주장한다.
물론 자기 속에 그 말의 실재가 없으므로 자기가 한 말에 자기 스스로 심판받게 마련이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에게는 깊은 침묵만이 있다. 그는 그 어떤 것과도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는 자'임을 알고 있다.
예컨데 자기는 자기 자신의 직업이 가리키는 그 사람도 아니고, 사회적 신분이 표시하는 그 사람도 아니고, 아담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고, 심지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사람조차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성경이나 경전이 필요없다. 그 자신이 곧 경전이다.
그는 이 세상이 꿈인줄 완전히 아는 사람이다.
그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궁극적인 진리를 알고 있으며 그는 곧 그 앎 자체일 뿐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존재에서 나오는 햇빛만으로 온 세상을 다 변화시키는 태양과도 같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와서 구체적으로 표면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슨 개혁운동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존재 자체가 곧 빛이며 진리이고, 더 나아가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보이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은 결코 외부적이고 조직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깊숙한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달리말해 존재가 곧 진정한 힘이다.
이제 이 긴 고찰을 마무리 함에 있어 우리 자신에게 한번 이것을 적용해 보자.
우리는 말씀을 듣고 스스로를 흙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흙이라고 '알고'있는가 아니면 흙인가?
흙이라고 해도 다 흙이 아니라 흙도 흙 나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