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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범 교수 인터뷰 전문 “헌법재판관이 헌법을 모르니 문제지...”


BY 김숙자 2005-02-21

한상범 교수 인터뷰 전문 “헌법재판관이 헌법을 모르니 문제지...”


2005-02-17 11:05 이기호 (actsky@dailyseop.com)기자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는 여전히 패기만만한 청년다운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한 대형서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이야기부터 시작해 사법부의 고질적인 문제 등에 대한 통찰을 풀어놓았다.

다음은 한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 최근 발행한 ‘살아있는 우리 헌법이야기(삼인)’의 저술배경과 내용은.

“나는 1960년 이래 전임교수로서 헌법을 연구하고 강의해왔다. 헌법선생으로 45년을 살아오면서 군사정권의 폭정에 항의해온 현실참여 학자로 알려졌고, 최근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3년간 일해 수구보수기득권 부류의 공격표적으로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다.

학자로서 평생 일제잔재청산을 과업으로 여겨왔고 2000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얼핏 보면 헌법학자로서 외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한 가지 목적과 이념을 추구해왔다. 학자로서 인권이라는 것은 평생의 과제이고 실천목표이며 이상구현의 집념이다. 그런데 인권은 민주화가 된 조건에서만 보장되고 민주화의 조건으로 우리사회의 반민주적 잔재인 악법과 잘못된 관행, 이데올로기를 청산해야 한다.

헌법은 민주제도의 법적 조건이기 때문에 국민의 헌법이 돼야 한다. 그래서 이전에도 교과서를 썼지만 대중과 함께하는 책을 쓰고자 1997년 ‘헌법이야기(현암사)’라는 책을 발간했다. 당시 상당한 호응을 받았고 그해 5월 법의 날을 맞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 갔을 때 YS가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썼느냐’고 묻기도 했었다.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YS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면서 세월이 흘렀고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엔 일부 내용을 보완만 하려다가 성에 차지 않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4월 경 시작해서 12월 의문사위 임기가 마치기 전에 대강 마무리했다. 21세기에 민주개혁시대의 국민의 헌법을 알려야 한다는 열정으로 공무시간을 내서 쓴 것이다.

이 책은 누구나 우리 현실의 문제로서 헌법문제를 접근하도록 썼다. 예를 들어 헌법이 아무리 인권을 보장한다고 규정해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 현실에서 보면 법은 권세 있는 관료나 돈 많은 부자편이 된다. 또 악인에 의해서도 교묘하게 악용된다. 그래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착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러한 법의 잘못된 현실은 어디에서 연유되며 그것을 극복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현행 헌법제도를 통해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헌법교과서나 그 아류가 아니다. 국민대중이 옆에 두고 답답하고 궁금할 때 읽을 책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 최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정치성’ 논란이나 여당의원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집중된다는 지적이 있다. 수구적 성향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직설적인 얘기를 처음부터 하지는 않겠다. 원래 헌법은 고도의 정치적이며 가치판단을 내포하며 정치도 국민생활의 일부다. 다만 답답해하는 것은 헌재가 수구적 보수적 기득권을 편드는 결정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면, 헌재는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결정을 하면서 국보법옹호론을 제기해 결정내용으로 스스로의 이전 결정취지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올바르고 책임 있게 적시하지 않았다. 이건 재판관이 할 소리가 아니다. 특히 보안법이 그 제정 이래 반백년을 매카시적 악법으로 이용됐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조차도 폐기를 건의했고 이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명시해야 하는데 아예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이전도 마찬가지. 수도 서울에 대한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에서도 ‘성문헌법주의’를 무시한 ‘관습헌법’이란 엉뚱한 소리를 내세워 세상의 헌법학자들을 웃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체로 헌재의 수구적 경향은 이미 알려졌지만 딱한 일이다.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을 아는 법률가들이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헌법재판관들은 모두 민사와 형사를 처리하는 재판관 출신들이다. 헌법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젊은 유학파 출신들을 헌법연구관을 채용해 이론적으로 보충 받는다. 사실 이 사람들이 헌법의 결정문을 작성한다. 9명의 헌법재판관들은 거의 헌법을 공부하지 않는다. 프랑스나 독일, 일본의 경우 헌법재판의 경직화를 막기 위해 헌법재판관에 법학교수나 외교관 출신이나 노동행정종사자 출신의 공무원을 포함시킨다.

법원의 판결도 위로 올라갈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 우리 법원에 문제가 있는 것은 YS정부나 DJ정부, 지금의 참여정부에서까지 사법개혁이 당면과제가 되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솔직히 현 재판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누가 재판을 신뢰하나. 박정희 시대부터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정권 하에서 법원이 어떤 판결을 해서 인권을 유린했는지, 어떻게 군사독재의 들러리 역할을 해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민주개혁을 하자며 전두환이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을 때 재판관들이 떳떳했나. 독재정권 당시 하수인 역할을 했던 재판관들이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DJ정부도 법조계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도 박정희나 신군부 하에서 억울한 재판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 한 가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하나만 재심이 됐다. 우리 법에서 재심은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학생들은 재판을 거부했다.

즉 사법개혁의 요지는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법조인을 퇴출시키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헌법을 악법으로 적용한 재판관들, 사법살인과 오판에 관여한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간판으로만 알뿐 실제 민주주의가 뭔지 모른다. 일제의 파시즘에 절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해방 후에 판검사로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민주주의가 되겠는가. 해방 60년이 넘도록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들어보자. 1952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은 2대 대통령당선이 국회의원의 투표로는 어려워보이자 깡패들을 동원해 발췌개헌이라는 ‘국회테러’를 저질렀다. 이때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됐고 이를 비난하다가 검거됐다. 당시 죄목이 ‘국부(國父)를 비난했다’는 내용이었다. ‘민주주의에 어떻게 국부가 존재할 수 있냐’고 반박하자 경찰들은 ‘말이 많다’며 뭇매를 때렸다. 당시 나를 고문하던 고등형사, 경관들이 이후 경찰공무원이 됐다.

‘조봉암 사건’으로 재판한 김갑수 판사도 재심기회를 주지 않고 사형을 내렸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인가. 개인적으로는 김 판사의 제자로 학문을 배우고 신세를 많이 졌지만 항의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자네가 뭘 알겠나, 공부나 열심히 하게”라고 말했다. 이후도 동국대 법정대학장, 관선 이사장을 거치며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개인적 친분과는 별개로 비난받아야 할 점은 비난해야 한다.

국민들도 책임이 있다. 사법개혁은 정부나 열린우리당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일부 변호사나 학자,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민들이 나서고 국회가 해야 한다.”

- 제2기 의문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위원회의 실적을 평가한다면.

“먼저 의문사의 개념을 짚어보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3분의2는 정치적 반대자를 숙청한 것으로 장준하, 최종길 등이 이에 해당된다. 살아 있었으면 우리나라를 앞장서서 이끌 인재들이었는데 아깝게 죽었다.

의문사는 독재정권의 치부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과 이에 편승해 기생하는 무리는 폭정으로 치닫게 되고 더욱 압제와 공포정치의 악순환을 이어가게 된다. 박정희 지배로부터 신군부지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청년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가 고문을 당해 죽고 뱅신이 되어 서서히 죽어갔다. 지금도 아예 집안이 망하게 된 무수한 비극들이 존재한다. 염치 좋고 뻔뻔스럽게 박정희나 전두환독재를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굴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독재권력이 알게 모르게 죽인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조사활동이 의문사진상규명이다. 바로 그런 활동을 독재세력이나 독재 하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부자가 되고 출세한 사람들은 싫어한다.

나는 의문사위 위원장으로 3년 동안 지내며 몇 백 년을 살아오는 것보다 더 많은 미움과 욕을 먹었다. 나중에는 ‘빨갱이니까 체포조를 만들어 징치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더라. 그들은 법위에 군림하는 무법자역을 해도 세상에서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우리 법은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가장 큰 문제는 개혁의 대상이 스스로 개혁하겠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원(안기부)이나 국방부가 자신들의 과거를 ‘스스로 해명하겠다’고 나섰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스스로 해명할 의지가 있었다면 진작 밝혔어야 했다. 왜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나. 벌써 백서가 나왔어야 했다. 무슨 조사기구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들이 가진 기록만 공개하면 된다.

DJ정부 5년 동안에도 이런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문제는 밝히지 않은 내용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만 모른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인가. 자료가 있는데도 내놓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왜 3자에게 묻자고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사위의 활동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분명하다. 개혁정권에서 유일하게 국가기관으로 역할을 해냈다. 의문사진상규명을 통해 독재의 추악하고 비열한 모습과 그 배경과 제도의 추악한 일부분을 드러냈다.

위원회의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꼭 읽어 달라. ‘국립법과대학의 교수인 최종길을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만들고 또 그것도 부족해 자기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때려죽이는 권력자의 잔혹함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런 어둡고 두려운 지긋지긋한 세상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고심 끝에 개선·개혁 방안을 건의한 보고서이다.”

- 의문사위 결정 중 지난해 7월 좌익인물에 대해 ‘간첩과 빨치산도 민주인사로 규정했다’며 매카시즘 공세로 위원회 조사관들까지 ‘빨갱이’로 모는 보수언론들의 공세가 있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일단 4가지로 상황을 구분해서 정리해보자.

첫째, 비전향장기수 3명의 문제다. 현 전향제도는 일제하인 1925년 최대 악법인 치안유지법체제의 잔재로서 김대정 정부 때 폐지됐다. 그 연장선상의 준법서약제도 폐지됐다. 그래서 비전향 또는 전향을 두고 사람을 규제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 문제가 된 장기수 3명이 고문학대를 받고 죽음에 이른 사건으로 인해 전향을 강제하는 악법제도가 폐기됐다는 점에서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의 전력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 생명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가 죽었다. 그들의 전력이 문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 자체의 의미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것인가. 억울한 죽음으로 전향제도를 없애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1993년에 북한으로 송환된 이인모 씨를 1990년에 만났다. 20대에 종군기자로 나설 당시 23세의 부인과 어린 딸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향하면 이들이 바로 숙청될 상황이었고 이 씨에게서 ‘처와 딸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전향하면 가족이 죽는다. 물론 세계관이나 신조의 문제도 있지만 많은 비전향장기수들은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둘째, 문제된 사람들이 빨치산이나 간첩이라고 해서 법률의 보호 안에 두지 않고 고문·학살을 해도 좋다는 법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빨치산 출신의 이태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숨긴 채 민주산악회 부회장에서 국회의원까지 했다. 후에 그가 쓴 빨치산 수기 ‘남부군’을 읽어보라. 그가 빨치산출신임을 인정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박정희라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군사부장으로 간첩 중의 간첩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사형을 간신히 면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대통령을 했다. 그런데도 보수세력은 박정희에 대해 침묵한다. 박정희는 그의 부인에게도 그 사실을 해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3년 대통령후보로서 윤보선 후보가 해명을 요구하자 오히려 ‘중상모략이고 매카시즘적 수법’이라고 최고회의 대변인을 통해 호통을 쳤다. 그가 국민 앞에서 전향한 적이 있는가. 전력을 근거로 사상과 세계관을 추단·예단해 법률의 보호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셋째, 어느 개인의 사상, 양심, 신조 및 세계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인간존엄과 가치존중의 기본골격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유린하나. 자유민주주의의 알맹이를 빼고 중세기적 마녀사냥의 이단 심문과 다를 바 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은 안 된다. 우리가 과거 어느 한 시기의 잘못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도 자신과 대립되는 인사나 당파를 매장하는데 써먹는 것은 안 된다.

넷째, 나는 헌법교수로서 평생을 통해 법치와 민주를 강의해오고 있다. 특히 존 밀턴과 존 스튜어트 밀 이래의 사상의 자유란 원칙을 강조하고 법을 통한 인권실현을 외쳐온 사람으로서 전력이 이상한 놈은 인권도 없고 법을 무시한 채 죽여도 좋다는 논리를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학문이론과 지조의 포기는 나에게 그동안 45년간 강의한 것을 무효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학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회적 사망선고다. 그렇게 난폭한 억지로 무슨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에 해를 끼쳐온 것이다.”

- 앞으로 의문사진상규명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과거사법안이 아직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돼야 내실 있는 조사가 가능하다. 하루 속히 법안이 성립돼야 한다.

일단 법안이 되기를 팔짱끼고 앉아서 기다려서는 되는 게 없다. 의문사란 정치범죄를 가리고 숨기고 싶은 구부패기득권 독재정권 당시 부류의 방해를 돌파해야 한다. 이 법안의 원칙과 기본과 관련된 타협과 양보는 있을 수 없다.

잘못된 것을 털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 수 있나. 만약 반대한다면 이것은 역사공부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 역사를 공부하나. 세계 역사에서 독재와 살인을 자행한 정권을 청산하지 못한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뿐이다. 정말 창피한 일이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당시의 기득권세력이 그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은 천황제가 문제였고 우리나라는 권위주의와 ‘나라님’이라는 개념이 문제였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청와대의 상징은 봉황이다. 그런데 봉황이나 용은 사실 봉건의 상징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을 형상화해 세계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천자나 군주를 모시고 있는가. 외국 인사들이 와서 물어보면 설명을 하긴 하는데 다들 웃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일본의 여권에는 국화가 등장하는데 사실 국화는 일본천왕가의 꽃이지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다. 일본 국민들은 아직도 자신을 시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신하의 개념인 신민(臣民)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비슷한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구세력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자기들의 치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에는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돌파만이 필요하다. 도둑놈이랑 무슨 타협이 필요한가.

독재의 폭정에 대항해 투쟁하던 당시의 기백과 열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한 청년학생과 유수한 인사들의 영령에 더 이상 침을 뱉지 말라. 개혁은 결코 소풍놀이가 아닌 투쟁이라는 점을 벌써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