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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봉이 아닙니다.


BY 장미영 2005-10-07


저는 35세 주부로 지난 9월 28일 수요일에 상해에 있는 남편을 만나고 7세 아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시 대한항공을 타기로 했는데 비행기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려도 '정비할 것이 있으니 기다려달라'는 방송만 간간이 나오고 떠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밥을 먼저 먹고 있는 동안 정비를 끝내겠다며 기내식을 먼저 주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잠깐 내려서 기다리라 해서 모두들 비행기에서 우르르 내렸지요. 어찌될지 몰라 사람들은 화장실 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게이트 앞에서 우왕좌왕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송이 나왔습니다. 정비가 오래 걸리게 생겨 인천에서 아예 다른 비행기를 불러들이고 있으니 6시에 비행기가 도착하면 7시에 곧장 출발하겠다 하더군요. 이 비행기를 그대로 타고가면 승객들이 위험하니 안전하게 하는게 좋지 않겠냐는 분위기를 풍기는, 아주 웃기는 방송이었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날 다시 온 비행기는 9시가 넘어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밤중 12시가 넘어서 도착했습니다. 상해 푸동공항에서부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까지 대다수의 승객들이 대한항공의 직원들에게 항의를 하고 환불을 요구하며 서명과 연락처를 적어 냈지만 대한항공에서 그날 취한 최대의 보상은 이미 끊어진 리무진버스 대신 대한항공의 버스 세 대를 준비하여 마포, 강남, 강북으로 운행해준 것 달랑 하나였습니다. 아, 비행기 안에서 땅콩은 열나게 주더군요.
저는 인천공항으로 친정부모님이 승용차를 갖고 나오시기로 했는데, 대한항공에서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지 인천공항에서는 상해에서의 상황(비행기가 늦어진다, 몇시에 다시 출발한다, 이제 출발했다...)을 전혀 방송도 하지 않고 전광판에도 나오지 않아 도대체 언제나 오려는지 알지도 못한채 9시간 가량을 마냥 목빠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가 들으니 이런 경우에 항공사에서 환불을 해주거나, 적어도 무슨 티켓(다음에 동일 항공사를 이용할 경우 할인이 되는)을 주기도 한다기에, 제가 원래 치사하고 유치해서 그냥 내가 좀 손해보고 넘어가는 사람이지만 그날의 일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 대한항공에 메일을 보냈습니다.(여기에 세세히 다 쓸 수 없는, 개인적이지만 다른 그 누구의 개인적인 일도 될 수 있는 불만사항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항공에서 보내온 답변메일이 저를 아주 완전히 열받게 만들었습니다.
재정경제부 소비자피해보상규정에 따르면 예견하지 못한 정비상의 문제에 대해선 항공사에 면책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메일이 온 것입니다.
"예견하지 못한 정비상의 문제"라니요?
그럼 미리 예견한 정비상의 문제로 승객이 손해를 입을 때에만 보상을 해준다는 말인가요?
예견하지 못한 문제로 승객이 손해를 입었을 땐 승객이 참는수밖에 없단 말인가요?
그날 그 비행기는 하루 왼종일이 걸릴만큼 중대한 정비상의 문제를 승객들이 비행기에 앉아서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에 발견했단 말인가요?
7시에 다시 출발하겠다던 비행기는 또 무슨 예견하지 못한 문제로 9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단 말인가요?
이 모든 상황을 알지도 못한채 마냥 기다리고 있느라 그후 며칠동안 몸살을 앓은 가족들에 대해선 재정경제부에서 무어라 하던가요?

차라리 대한항공에서, 죄송하다, 그런데 회사 규정상 금전적으로 어떤 보상을 해드리기는 어렵다, 그래도 정말 죄송하다... 이런 답변을 보내왔더라면 저는 귀찮아서라도(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란 걸 얘기했지요.. -.-;) 그냥 넘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정경제부 소비자피해보상규정 어쩌구... 하는 식으로 나온 것을 보고,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또는, 소박한 시민으로서 뭔가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가는 대다수의 소비자를 대단히 이용하고 나아가 우롱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이 글을 적었습니다.
소비자는 봉이 아닙니다. 1시에 출발하기로 했던 비행기가 9시가 넘어 출발을 해서 밤중에 공항에서 내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새벽에 집에 돌아온 주부로서 항공사에게 어떤 종류의 보상이라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이참에 뭘 뜯어내려는 게 아닙니다. 불쾌하고 잘못된 일에 대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별 문제 아닌줄 알고 넘어갈텐데 그럴 수 없다는 의사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