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맞는다면 나는 그것을 옳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맞지 않다면 그를 옳다 하지 않을 것이다. 옳고 그름은 결혼이 되었느냐? 결혼이 되지 않았느냐? 의 문제인 것이다. 옳을지라도 결혼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약은 약이 아니다.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약이 따로 있고 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떠하냐? 인 것이다. 어떤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고 해로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며 능력이며 생명이 된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와 강도가 진 십자가는 다른가? 십자가가 다른 것이 아니라 거기 달려 있는 자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고난이라도 같은 고난이 아니라 누구는 자기 때문에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만 또 누구의 고난은 자기를 위한 고난이 아니라 주를 위한 고난이다. 이는 다 그 사람이 누구냐? 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다 관계 안에서 이렇고 저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가 따로 있고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죄는 다 관계 안에서 나온 말들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의와 죄가 있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의와 죄가 있다. 생명과 사망은 다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너와 내가 생명의 교통이 된다면 너는 나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생명이 되지 않는다면 너와 나는 무관할 수도 있지만 해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너의 하는 일마다 나를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는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너를 돕겠다고 하는데 너에게 생명이 되고 이롭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롭고 생명을 해하는 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구원도 관계 안에서의 구원인 것이다.
세상도 자기에게 생명이 되는 자들에게 자기 전부를 준다. 악한 자라도 자기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고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준다. 악한 자일지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보냐?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겠는가?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분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사망이며 저주이며 심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이지만 어떤 자들에게는 구원이시다. 이는 다 우리의 어떠함이 그분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해가 되고 사망이며 저주이며 걸림돌이며 정죄이며 심판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는데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고 영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혼 관계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생명의 관계라면 그 관계 안에서 반드시 사랑이 샘 솟듯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같은 생명이 아닌데도 사랑하라 하면 사랑이 되겠는가? 사랑은 한 생명 안에서 하는 것이고 한 영 안에서 하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은 자기와 온전히 하나 될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자기와 온전히 교통이 되는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둘도 필요치 않다. 오직 한 사람이면 된다. 우리의 영이 자포자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이다. "내 영혼이 곤고하나이다. 죽게 되었사오니 나를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이 절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의 고백인 것이다. 자기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세상 살 맛 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아무 힘이 없이 늘어진 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천하를 옮길만한 힘이 솟고 능력이 솟구친다. 세상은 다 관계 안에서 유지되고 발전되고 진보된다. 천국도 다 관계로 되어있다. 건축이 관계이며 몸이 관계이며 나라가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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