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들에게도 그해여름은 있었죠,엄마! 지난해 여름은 무척이나 뜨거웠던 계절이었죠, 가난한 뒷뜰 붉은 벽돌담장밑에 피어있던 봉선화꽃잎을 물들여 손톱위에 올려놓으며, 우리는 그렇게 또 계절 한켠을 지나가나했죠.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는 언젠가 한번은 치뤄야 할 슬픔이었지만, 이미 각오하고 있던 크기보다 더 큰 모습으로 다가왔던 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못했다는 점. 평생을, 술로 살아오셨던 아버지가 나중엔 간암말기에 이르러서, 결국은, 우리가족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쓸쓸히 먼 길을 떠나셨을때 누구보다도 더 깊이 가슴아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엄마. 우리에게 엄마는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울타리 같은거였죠,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아버지덕분에 직접 생활전선으로 앞장서야만 했던 엄마는 정말 안해본일이 없으셨죠. 목공소에서 하루종일 대패를 밀어 책상을 만드셔야했던 그시절,그때는 늘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시곤했죠, 엄마가 언제나오나 기다리고있던 어린 우리 세 자매에게는 깊고 푸른 밤, 싸리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로 앞다퉈서 들마루로 나서곤했죠. 진한 송진냄새와 미처 털지못하고 목공소를 나선 엄마의 몸 여기저기엔 대팻밥들이 많이도 붙어있었죠, 지금생각하면, 그 훈장같기만 한 그 수고들이 이렇게 무사히도 우리 세형제들을 키워낸 댓가에요. 매일아침마다 학교에 가기전, 돈달라고 쭈루룩 선 우리들앞에서 푸른 물빛 작업복차림으로 마른 검불같은 손바닥만 비비고 서계셨던 엄마, 때로는 돈대신에 몽둥빗자루를 들어 대문밖으로 우리들을 쫒아내면서 학교에 가라고 소리쳤던 엄마가 그땐 정말로 미웠어요. 하지만 이젠 알것같아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먼 곳으로 기숙사생활을 하며 직장을 다니게 되었을때, 그때 사무치도록 보고싶었던 얼굴은 바로 엄마였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힘을 내라는 엄마의 격려를 고단한 일이 끝난뒤면 늘 공중전화로 들으면서 그때 그 초년시절을 너무도 잘 견뎠죠.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번 힘을 낼수있었던 것은, 바로 어떤 순간에도 눈물을 보이지않고 그 모진세월을 참아왔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에요. 우리 가족들에게 또 한번 닥쳤던 그 상실감. 술이 없으면 주체를 못하셨던 우리 아버지, 커다란 오디오를 무리하게 사셔서는 매일 술을 드시면서 트롯트를 들으시고 온 동네사람들의 원성을 자자하게도 들으셨던 그 아버지가 나중엔 간암말기로 저 세상을 가셨을땐 우리 가족모두는 서로를 껴안을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그리고 활활불타는 화구속에 아버지가 누운 관이 들어가기시작할때 , 그순간만큼은 눈물마저도 말라붙었는지 왠일로 눈물마저 나지않더만요. 아무리 지난여름이 더웠다 한들, 화구속의 일렁이는 불꽃만큼 할까요. 그렇게 힘든 시절을 지나온 엄마가 이젠 심장이 아파 허덕이시니.. 언젠가는,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듯이 엄마와도 이별할 시간을 당차게 감내해야 할텐데 어찌보면, 가난하고 배고팠던 그 때를 건강하게 헤엄쳐올수있었던 것도 엄마의 사랑이 있어서였던 것인데, 앞으로도 우리 더 얼싸안고 같이 그 어려움 이겨내고싶어요. 사랑해요, 엄마.. 얼마전에도 딸들 주려고, 감자한광주리를 삶아두고 우리들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죠, 정말정말 엄마를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