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퇴근 시간 즈음에 전화가 옵니다.
수화기를 드니 오늘 좀 늦는다는 말.
예전 같았으면 "왜?, 또 어딜 가는데?, 술 조금만 먹어요..."
이제는 안 하렵니다.
결혼 14년이 다 되어가도록
늘 친구에게, 술에게, 토요일과 일요일엔 축구에게 당신을 빼앗기고
난 두 아이를 혼자 키우듯 했답니다.
큰 아이가 아파 작은 아이 걸리고
큰 애 유모차에 태워 축 늘어진 모습으로 병원 델고 갈때도,
작은 아이 팔이 빠져 벌렁이는 가슴 안고 병원 갈때도
당신은 없었어요.
집안이 어수선하고 어질러져있으면 짜증부터 내는 당신이어서
친구에게 선물받은 블럭도 책장 위 높은곳에 올려진채 잊혀지다가
늦게서야 꺼냈더니 큰 앤 그걸 갖고 노는것을 낯설어하더군요.
그땐 3교대 교대근무라서 낮엔 당신 깰까봐
고향도 아니어서 갈 곳도 없는 난 늘 아이를 델고 실랑이를 벌였답니다.
기저귀 한벌 갈아주지 않는다고 속 상해 하고 힘들어하면서도
그럭저럭 큰애가 중학생이 되었네요.
물론
소도시에 살다보니 주말이면 냇가로, 휴가때면 바닷가로 좋은 추억은 참 많이 만들어줘서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없던 자동차를 사면서
요즘은 아이 델고 잘 나서지 않는 날 아는지라
틈 나는대로 한바퀴 휘 돌아 바람이라도 쏘여주려 하고, 애들에게 나름대로 노력하는 당신모습도 예전에 비하면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나이는 40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건강은 뒷전이고, 술, 친구, 축구가 먼저인 당신은 여전하네요.
연말엔 연말이니까 더 한거겠거니 하며 기다렸어요.
신년이 되면서도
이틀에 한번꼴로 새벽에야 들어오고, 거의 인사불성으로 들어와 필름 끊은적도 한두번이 아니네요.
그런 날이면 자는것도 깬것도 아닌 나는 가슴 졸이며 초인종소리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골목어귀에 주차하는 차 소리, 옆집 대문소리, 지나가는 이의 발자국 소리....
어느것 하나 내 귀를 자극하지 않는것이 없습니다.
2월이면 채워지는 14년 세월을 살면서
이런 저런 남들은 겪지 않는 사소한, 그러면서도 잘 낫지도 않는 병들을 잘 달고 다닙니다.
병원에 가면 늘 듣는 말도 비슷합니다.
신경성, 스트레스성...
처음엔 그냥 딱히 할 말 없으면 하는 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 몸과 마음이 그걸 같이 느끼게 되었네요.
많이 신경질적이어지고, 예민해지고, 당신의 귀가시간에 민감해지고..
그냥 술 마시고 와서 고이 잠만 자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렇다면 몸걱정과 돈걱정밖에 안 할텐데...
물론 한번이지만 만삭이 된 몸으로 파출소에 불려간적도 있었네요.
술 마시던 친구와 시비가 붙어서 싸웠었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얌전히 앉아있는 모니터를 주먹으로 두들겨서 손도 다쳤었네요.
욕실 문에 붙은 유리를 깬 적도 있고, 냄비와 밥솥도 한번씩 날아다녔네요.
택시 기사분과 시비가 붙은적도 있고
집에 들어왔다가는 자꾸만 또 나가려고 해서 어머님과 함께 억지로 달래서 델고 온 적도 있고, 마당에 세워둔 큰애 유모차에 올라앉아 잠이 든 적도 있네요.
택시 아저씨를 세워놓고 대문 벨만 눌러대고, 문을 열어주면 또 닫아서 벨 누르고...기다리던 아저씨가 화가 잔뜩 나서는 싸움이 붙은뻔 한 적도 있네요.
아저씨가 기다린단것 조차도 잊고 있었죠?
플라스틱 쟁반을 집어던진적도 있네요.
적잖은 세월 당신과 살면서 왜 내가 예민해질 수 밖에 없고, 당신의 귀가시간, 음주량에 민감해지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는건지 모르는척 하는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며칠전엔 내가 당신을 친구로 부터 떼어놓으려고 한다는듯 말 하더군요.
내가 느끼는 감정과 당신께 전달되는 감정이 그렇게 다른건지....
그런 당신이 오늘도 늦습니다.
어제는 마침 밀려오는 피로감에 술 몇잔 마시면 잘 자겠다 싶어서 오미자주 담은걸 6잔이나 마셨어요.
물론 알콜 중독.......?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잘 잤어요.
화장실도 한번밖에 안 갔고요, 거실에 앉아있는 당신을 본 기억도 꿈인지 생신지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어요.
물론 어제랑 그제는 조금만 늦게왔고,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다른때 같았으면 고맙고 감사하기까지 했을텐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네요.
당신께 직접 얘기 했듯이 난 당신에게서 좀 여유로워지고 멀어지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렇잖아도 방학 후 아이들이랑 하루종일을 같이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스트레스가 최고치를 달해서 돌아버릴 지경인데
당신에게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가 진짜로 돌아버릴것 같거든요.
관심 좀 가져달라며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걸어오는 당신이어서
그나마 우리 관계가 이만큼은 유지된다는거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기분이 풀어져도 이틀을 못 가니, 내가 더 힘이 든다는거죠.
차라리 그냥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포기라도 할 수 있게 그냥 둬 버리지...............
답답하고 짜증스럽고, 한숨만 나옵니다.
아직은 체념도, 포기도 안 되나 봅니다.
나도 내가 몰두 할 일을 가져야겠는데, 애들 개학하면 뭐라도 배울겁니다.
지금 이렇게라도 넋두리를 늘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결혼 전 보다 결혼 후의 당신을 더 사랑한다고 느끼며 살았는데, 그래서 행복한 기억도 많은데~~
야속한 당신.
정말 야속한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