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로도 유명한 퇴계 이황은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게 되자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지금 인망 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다.”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 후 승승장구한 퇴계는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도 식사 때 반찬가지 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는 등 고언을 마다치 않았다.
퇴계는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그같은 연유는 그가 원래 벼슬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설하고 그러한 퇴계였으되 처복은 없었던가 보다.
퇴계는 아내와 사별한 뒤 정신이 오락가락한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는 귀양살이를 하던 권질이 퇴계의 사람됨을 알고
"온전치 못한 여식을 맡길 사람은 자네밖에 없으니
부디 이 죄인의 원을 들어주게." 하는 간청을 퇴계가 받아들인 때문이다.
역시나 정신이 맑지 못했던 그녀는 퇴계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하루는 그가 상가에 가려다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보고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 기워 주었고
퇴계는 말 없이 그 옷을 입고 문상을 갔다.
사람들이 퇴계의 옷차림을 보고
"흰 도포는 빨간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묻자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밖에도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집어 먹는 등 권씨 부인이
잘못을 할 때마다 퇴계는 그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웃음으로 넘겼다.
어느 날 퇴계는 자신의 제자였던
이함형이 부인을 소박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퇴계는 제자를 꾸짖는 대신 조반을 함께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손님상이었지만 반찬은 산나물과 가지나물, 된장 한 종지뿐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정신이 혼미하다고 들은
권씨 부인에 대한 퇴계의 말씨와 태도였다.
부인을 깍듯이 존대하는 스승의 모습에
제자는 자신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음을 크게 뉘우쳤다.
퇴계는 부부의 근본 도리를
잊은 사람은 글을 공부해도 쓸 곳이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첫째 부인이 죽은 후 퇴계가 맞은 권씨 부인은
처녀 적에 할아버지 권주(權柱)가 갑자사화로 희생되었다.
아버지 권질(權?)과 숙부 역시 정치적 음해를 받아
각각 귀양을 가고 형장에서 매 맞아
죽었으며 숙모는 관비로 끌려가는 등의 참변을 겪었다.
그런 지독한 참변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부인이었지만 권씨 가문의 억울한 사정을
마음 아파하던 퇴계는 결국 권질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온전치 못한 부인과 살면서도 퇴계는
어려움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남편의 도리를 다해 보살폈으며
부인이 죽은 뒤엔 첫째 부인 소생의 아들들로
하여금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3년 상을 치르게 했다.
그러하니 오늘날의 속인(俗人)들 역시도
어찌 그를 존경치 않을 방도가 있으랴!
지난 5월 아내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투신자살한 것으로 위장하려던 40대 의사가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아내를 업고 자신이 근무하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모습이 CCTV에 찍히는 바람에 검거되었다는
그 의사의 경우 뉴스를 보자니 문득 그처럼 퇴계선생의 지독한 사랑이 떠올랐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다
홧김에 살해했다고 진술했다는데 부부가 살자면
어찌 만날 알콩달콩 사랑만 하고 칭찬만 할 수 있을 손가.
부족한 재취(再娶)임에도 그러나 퇴계 선생은 지성을 다해 부인을 ‘모셨다’.
그러한 퇴계와는 달리 조강지처인 아내를
단순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이마저 은폐하려했다는
의사의 경우에서 우린 다시금 오늘날의 지독한 에고이즘과
부부도리의 상실이란 부끄러움을 덩달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