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한 지난 삶이었음에도 지나버린 젊음의 시기는
분명 아름다운 분홍색의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 온다.
내가 권투를 배우기 시작한 건 10대 후반의 일이다.
그같이 권투를 배운 건 어느 날 문득 권투야말로
나처럼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사는 형편도 빈궁한
무지렁이가 ‘출세’의 방편으로 삼기엔 가장 이상적이라고 느낀 때문이었다.
또한 어쩌면 느닷없이 권투에 매력을 느낀 또 다른 모티프로서는
당시 세계챔피언으로 우뚝 선 복서 홍수환 씨의 영향이 지대했다.
주지하듯 불세출의 권투 선수 홍수환 씨는
지난 1977년에 파나마까지 날아가 벌어진
프로복싱 WBA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11전 전KO승을 자랑하던 ‘무적함대’ 헥토르 카라스키야에게
‘4전 5기’의 신화 창조와 함께 초대 챔피언에 올라
한국 프로복싱 사상 처음으로 두 체급을 석권한 영광의 사나이가 되었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한 권투는 그러나 불과 석 달 만에 그만둬야 했다.
집안의 친척 되는 어르신께서 사업을 하시는데
도와달라고 하여 그 곳으로 가야한 때문이었다.
그 때 친척 어르신께서는 모 관광지에서 호텔을 임대 받아
운영을 시작하셨는데 그 건물의 지하에 룸 살롱 겸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술집의 특성 상 속칭 ‘빈대나 붙어서’ 공술이나 얻어먹고
그도 모자라 용돈까지 뜯어내려는 한심한 부류들이 적지 않았다.
하루는 껄렁껄렁한 젊은이 셋이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며 내가 근무하고 있던 호텔의 프론트로 다가왔다.
그리곤 다짜고짜 +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그 지역의 터줏대감인데 두고 보았지만
내가 영 인사도 안 하여 괘씸하다나 뭐라나 하며
“오늘은 그냥 둘 수 없어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근데 당시는 나 역시도 피가 용광로처럼
펄펄 끓어 물 불 안 가리는 입장이었다.
또한 더군다나 약간이나마 권투의 ‘맛’을 본 터였음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손님들이 다 쳐다보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갑시다.”
그들 셋과 함께 호텔에서 약간 떨어진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로등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 골목에서
우리 네 남자는 그야말로 심야의 결투를 벌였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싱겁게, 그리고 아주 빨리 끝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체중이 가벼워 몸이 날아갈 듯 하였다.
아울러 권투 외에 특유의 박치기 전법까지 보유하고 있었기에
전광석화처럼 그들 셋을 삽시간에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에서 피가 터지고 입술마저 부르튼 그들은
이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리고 앞으론 날 형님으로 깎듯이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가 무슨 암흑가를 평정하고자 주먹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거늘 어찌 그런 망발을 다 한단 말인가?
“그런 건 관두고 앞으론 내 앞에 나타나지나 말거라.”
그 뒤로 그 녀석들과 또한 그 비슷한 부류의
이른바 예의 없는 젊은이들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유추하건대 그같은 연유는 아마도 내가 주먹깨나 쓰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는 따위의 과장되고
허황된 소문이 당시 나와 3대 1의 결투를 벌였던
그 젊은이들의 봉인첩설(逢人輒說)에서 기인한 듯 하였다.
아무튼 그러한 한 때의 무용담을 끝으로
나는 이제껏 또 주먹을 사용하거나 주먹으로 인한 불상사는 전무했다.
권투를 잠시 배운 까닭은 단순히 제 2의 홍수환이
되겠다는 각오가 그 원천의 모두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