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이었던 세종에겐 ‘대왕’이란 극존칭이 덩달아 붙는다.
그 이상의 성군(聖君)이 드믄 때문임은 불문가지다.
역사에 가설은 없다지만 아무튼 세종이 당시에 태종의 장자였던
양녕대군에게 보위가 갔더라면 분명 ‘세종대왕’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양녕대군은 고의든 아니든 간에 임금의 재목이 되지 못 하였다.
양녕대군은 그의 아버지인 태종이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붙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려서부터 남의 첩을 빼앗는 등의 온갖 난동을 부렸고
마침내는 이에 두 손을 든 태종에 의하여 결국 폐세자가 되고 만다.
양녕대군에겐 셋째아들인 서산윤(瑞山尹) 이혜가 있었는데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제 애빌 닮아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술에 취해 주정을 하다가 사람까지 죽인 이혜는 그러나
왕족이란 프리미엄으로 고성현으로 귀양을 잠시 갔다오는 걸로 처벌을 무마갚음한다.
이혜는 이 외에도 머리를 스스로 깎고 중이 되겠다며
금강산으로 가출하기도 했고 즉흥적이며 다혈질적인 성미가 제 아빌 꼭 닮았다.
이같은 부전자전 악행(惡行)의 압권은 양녕대군이
자신의 아들인 이혜의 첩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첩을 남도 아닌 아버지에게 빼앗긴 이혜는
울화병이 생겨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려죽였는가 하면
괜스레 엉뚱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주며 울분을 풀었다.
당나라 시대 때 시아버지였던 현종과 며느리인
양귀비의 ‘불결한 사랑’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시인 백거이는 이들의 사랑을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연리지가 되어
죽은 뒤에도 다시 만나 사랑을 영원토록 이어가라’며
장한가(長恨歌)까지 짓는 아부를 하였다지만 말이다.
이혜는 뒷간에서 홑이불을 찢어 끈을 만든 뒤
서까래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한 현장을 누군가가 일찍 발견했던지, 아님
끈이 끊어졌든지 하여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강화부사
기질(奇質)의 보고를 받은 문종은 이혜의 장인인 김개를 시켜 의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혜는 그로부터 이틀 뒤에 죽고 마는데
아무튼 이혜는 죽으면서 얼마나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했을까!
지금까지의 이러한 이야기는 일전 일독한
<조선기담>(이한 著 청아출판사 刊)에 나오는 대목을 간추려 소개한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 중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것이 있다.
이 말의 핵심은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딸)에게 반드시 모범의
본(本)을 보여야만 그것이 정도이고 또한 순리에도 맞는다는 걸 웅변하는 것이다.
식구들의 애간장을 졸였던 대입수능이 마침내 끝났다.
오늘 저녁에 그 아버지는 고되고 오랜 수능의 장정을 마친
아들과 딸을 술집이나 식당 등지에 데리고 가서
위로를 하고 겸하여 술을 잘 마시는 방법 내지는
주사(酒邪) 방지의 근원적 고찰 같은 걸 실천하면 어떨까?
실제로 필자는 아들의 수능이 끝난 뒤 술집으로 데리고 가
무릎을 꿇리고 어른으로부터 술잔을 받는 어떤 주법(法酒)부터 가르쳤다.
그 결과 아들은 아무리 만취하였어도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