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때 기숙사에서
8년전, 처음 일본에 왔을 때, 교토에서 난 고기집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저녁 5시부터 밤 10시까지 하고 나면 거의 파김치가 되곤 했는데
기숙사에 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샤워였다.
* 만화 '당그니의 일본표류기' 중에서 고기집에서 고기를 나르고, 접시를 치우고 닦고, 청소하고... 돌아오면 얼른 씻고 잠을 청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숙사에는 나 혼자만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서 누군가가 순서를 정해놓고 이미 쓰고 있었다. 밤 11시 반 정도는 되어야 들어가서 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샤워실 안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샤워보다는 욕조를 이용해 주세요!' 매일 욕조에 물은 채워져 있었다.
즉,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기숙사라(아침에 밥이 나오는 하숙집 분위기) 샤워기로 몸을 덥힐 것이 아니라,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와서 간단히 몸을 씻으면 물값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몸도 안 씻고 욕조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님-추가)
문제는 이 욕조 물이 깨끗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온 물이라는 것이다. 즉, 물을 한번 받아 놓고 계속 쓰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목욕탕이 아닌 이상 물을 받아 놓으면 욕조의 물이 식기 마련인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은 시스템인 것이다.
아무튼 그 때 이물질이 조금 떠있던 그 욕탕 안에 몸을 담그면서 고기집에서 배인 땀냄새를 지우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난다.
2. 욕조에서 온도조절이 된다.
도쿄로 올라 와서 집을 얻어 살 게 되자, 일본의 욕조 시스템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본집에 욕탕을 잠깐 설명하면 우선
가장 큰 차이는 화장실과 세면대와 샤워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샤워실에서 중요한 것은 샤워기라기 보다는 욕조다.
<욕조 위에 덮개가 있어 잠깐 동안 쓰지 않을 때는 온도가 내려가지 않도록 해준다>욕조도 그리고 크지 않고 한 사람 정도가 무릎을 굽히고 앉을 정도의 크기라서 물을 담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물을 쓰지 않는다.
옛날부터 온천 및 목욕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하루가 끝나는 시점은 샤워가 아니라 이렇게 욕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일이다.
한창 더운 여름날,
회사 일본 여직원에게 집에 가서 뭐하냐고 물었더니
욕탕에 들어가서 한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더운 여름에도 욕탕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본 욕조의 가장 큰 특징은 뭘까.
온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 물 받을 때 온도 조절은 물론, 이미 받아놓은 물이 차가워졌을 때 다시 데울 수도 있다.
가족이 많은 경우 아빠,엄마,아이 순으로 욕탕에 들어가는데 그 때 사람별로 물을 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미 받은 물을 다시 데우는 식으로 쓰는 데, 오이다키(おいだき)라는 것을 누르면 차가워진 물도 다시 덥혀지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매일 욕조에 몸을 담그지만 한국인인 나로서는 매일 담그지는 않고 가끔 딸 아이 목욕시킬때 같이 들어가서 장난을 치거나, 정말 피곤할 때는 물을 받아놓고 온 가족이 번갈아가면서 쓴다.
<사진/ 욕조 안에 있는 동그란 구멍으로 물을 순환시켜 탕을 재 가열한다, 신축맨션의 욕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욕조에 넣어서 쓰는 입욕제가 인기다...
입욕제란 목욕물에 풀어서...피부를 보다 매끄럽게 해주거나 향기를 내게 하는 것인데…
여기서 잠깐, 무슨 입욕제가 있는 지 잠깐 볼까.
이건 일반적인 입욕제다.
그런데, 입욕제가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도 있다.
다음은 새우튀김 입욕제...
새우튀김을 감싸고 있는 노란 계란같이 생긴 입욕제를 넣으면 노란부분이 녹으면서 튀김요리 만드는 것처럼 물 안에서 거품이 나온다.
다음은 지폐 입욕제
지폐로 된 입욕제를 10장 정도 넣는다.
딱 10장만 넣어야지 재미 있다고 더 넣으면 안된다고 한다.
3, 일본엔 욕조? 한국엔 연수기?
이렇게 일본에서 욕조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가면 약간 낯선 인상을 받는다.
한국에는 샤워시설만 있거나, 욕조가 없는 경우도 있고(부모님 집)
있어도 욕조에 주로 물건을 담아놓는 용도로 쓰지 그곳에서 목욕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한국사람에게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은 대중 목욕탕에서라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 중에서 일본과 다른 점은 샤워에 더 집중한다는 점이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수기다.
샤워하기 전에 한번 물을 걸르는 일종의 정수 역할을 하는 것인데....
* 연수기우리가 쓰는 수돗물에는 칼슘, 마그네슘, 석회염과 수도관의 이물질들이 들어있어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기 쉬운데, '연수기'라는 것을 사용하면 이런 불순물을 제거해서 순한물로 만들어 피부를 매끄럽게 해준다
최근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처제네 집이나 처가댁은 모두 연수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쓰기는 몇년 되었다고 한다.)
연수기를 쓰는 이유는 처제네는 아이가 있어서 아이들을 씻길 때 필요하고, 장모님은 피부가 매끈해져서 좋다고 한다.
즉 한국은 샤워를 주로 하다 보니 이왕이면 피부에 좋은 물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필터를 갈아줘야 한다는 점이 싫다는 의견도 있다.
4. 한일 혼합(?)으로 연수기+욕조 달아볼까.
연수기를 알고 나니, 최근에 피부가 건조해져서 고생 중인 나도....
입욕제 대신 연수기를 달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한일 양국이 혼합된 연수기 + 온도 조절 욕실이 있으면 어떨까 싶다.
그래야 바쁜 평일에는 샤워로만 간단히 피부관리를 끝낼 수도 있고, 주말에 '새우 튀김 입욕제'같은 걸 풀어서 꼬맹이 딸과 함께 욕조 안에 놀 수도 있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