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저에요.
창밖으로 펼쳐진 파란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맑아요. 그 하늘 아래로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먼 산에는 싱그러운 푸르름 사이사이로 분홍빛 진달래가 곱게 수를 놓았어요 . 아파트 화단 입구에 피어 있는 솜사탕 같은 목련꽃, 길거리 가로수마다 돋아나는 연두빛 이파리들, 세상은 온통 봄으로 가득하답니다. 베란다 구석에 놓인 화분에는 키랑코에 꽃이 노랗게 피어 집안을 화사하게 해주고 있어요. 겨우내 묻어있던 먼지를 털어내버리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기억나요? 이번 봄이 시작될 무렵,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갔다가 화원 앞에 놓여진 이 꽃을 보고 망설임 없이 샀었던 일이.
"웬일이야? 꽃을 다 사고."
"엄마, 꽃 이름이 너무 날카롭다. 키랑코에가 뭐야? 키랑코에가.......?
"그런데 엄마 잘 키우실 수 있어요?"
작은 물건을 살 때도 몇 번을 생각하고 사는 평소의 내 모습과 다른 내 행동에 모두들 한마디씩 했었죠.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노랗게 핀 작은 꽃잎을 받치고 서 있는 넓고 두터운 잎을 보고 있으니 왠지 믿음직스러웠어요. 저렇게 든든한 잎들을 딛고 서서 피어 있는 노란 꽃이 작지만 무척 강해 보였어요. 아마 그래서 선뜻 사게 되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당신을 처음 만났던 때도 겨울 끝에 막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었어요.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진 것은 없어도 마냥 즐거웠던 그 때, 당신을 만나는 일이 저에게는 전부가 되어버렸었죠. 한 시간이고,두 시간이고 마냥 기다리면서도 당신이 제 손을 꼭 잡아주면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시간들은 모두 잊어버리곤 했었죠.
그렇게 5년 넘게 단신을 만나면서 결혼하기까지 정말 힘들었던 시간도 많았어요. 유난히 어머님께 효자 노릇을 하던 당신은 며느리 감으로 저를 반대하시던 어머님께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당신을 보며 원망도 많이 했었어요. 결국 저혼자 어머님께 찾아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길 한 번 주시지 않는 어머님께 잘못했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고 다리가 저려서 휘청거리며 집을 나서면 마당에는 하얀 목련꽃이 피어 있었어요. 그 때도 봄이었군요. 눈이 부시게 하얀 목련꽃을 보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었는데.......
지금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꿈에 그리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예식장에 들어설 때도 예식장 화단에는 개나리, 진달래 같은 꽃이 활짝 피어 있던 4월이었어요.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목련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고.......
그 후로,지금까지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면서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사랑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느껴졌어요. 당신의 사업이 부도를 맞아 모든 것을 내놓고 나서야 했을 때, 저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답니다. 그리고 사랑만 바라보고 결혼한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되었어요. 당신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모두 떠안고 생활을 책임져야하는 저로서는 당신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와 보니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겨 버렸네요.
"미안해, 고생만 시켜서. 결혼하면 정말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었는데.......아무튼 고마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어서. 이제는 나도 직장 생활을 하니까 많이 수월해질 거야. 고마워."
힘들 때 팔았던 결혼반지를 빼고 난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워주는 당신을 보며 그제서야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하루하루 돌아오는 날이 숨 가쁘고,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 오는 새벽을 맞이해야 했던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곁에서 지켜주는 단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제서야 사랑을 조금 알 것 같다. 너무 철이 늦게 든 게 아닌가.......
세월을 속일 수 없는 것처럼 새치가 하나, 둘 늘어가는 당신을 보면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걸 보면 저도 정말 나이 들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쯤 당신은 혼자서 술 한 잔 하고 있겠죠. 직장 때문에 주말이나 되어서야 당신 얼굴을 보는 생활도 벌써 5년째가 되어가나 봅니다. 처음에는 한창 힘들고 어려웠을 시기였기 때문에 홀가분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문득문득 당신 얼굴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그러고 보면 당신이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나 봅니다.
내일은 키랑코에 화분을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옮겨놔야겠어요. 그래서 마지막 꽃이 질 때까지 남아 있는 봄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남은 세월동안 남편과 내가 서로에게 키랑코에 꽃처럼 든든한 잎이 되어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