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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남편


BY 동요 2009-09-18

 

운전 한지 1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어리버리하다.

양손을 10시20분 방향으로 꽉 잡고 앞만보고 운전하는 내 폼 보고

꼭 어제 운전면허 딴 사람 같다고 누군가 말했으니까.

 

내 폼이 이렇게 엉성하니 남편은 내가 차를 몰고 지방강의 가는 걸 마땅치 않아한다.

그래서 서울 경기지역까지는 내가 운전해 가고 지방을 갈 땐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은 경우엔 남편이 일일기사가 되어주기도 한다.

 

주로 오전 강의가 많아 새벽일찍 집을 나온다.

남편은 이른 시간 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나를 데려다 주고 도착시간에 맞춰 마중나오기도 한다.

 

어제 10시부터 있는 상주강의를 위해 집에서 6시 조금 넘어 떠났다.

역시 남편이 터미널까지 태워주고 갔다.

쾌적한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매점에서 사온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차창밖으로 벼가 여물어가는 초가을의 아름다운 들판을 바라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겼다.

 

문득 내가 직업상 일이 있어 가는지 나만의 가을여행길에 나섰는지 헷갈릴 정도로 행복해졌다.

갑자기 나를 내려다 주고 간 남편생각이 나면서 지난 해 봄 남편과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어쩌다 남편과 둘이서 시내버스를 탔던 날

나는 모처럼 둘이서 버스를 탄 드문 기회라 괜히 즐거워져서 저 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자고 이끌었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연인석'이라고 말했다.

 

나의 이끌림에 반강제로 앉게된 남편은 조금 후 지는 석양빛이 강하게 창으로 들어오자 눈을 찡그리며 말했었다.

빛이 따가우니 혼자 저 앞에 가 앉으면 안되냐고.

그러자 나는 그의 손을 강하게 끌며 말했다.

 

"그냥 좀 앉아 있어요! 금방 집에 도착할텐데. 그리고 내가 말예요.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데. 내 옆에 앉는 거 그거

고마워 해야 해요. 텔레비젼에 얼굴도 나왔는데. 당신은 뭐 텔레비젼에 얼굴 나온 적 있어요?  한 번도 없으면서.."

 

내가 생각해도 유치찬란한 이 말을 해놓고 좀 부끄럽긴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님편이 웃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너 뭘 모르는구나. 남자는 말야. 텔레비젼에 얼굴 안나오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라는 걸.

요즘 남대문 방화한 남자 밤낮 TV에 나오더구먼 "

 

여느 강의장에서처럼 상주 강의도 감동이었다. 

자녀를 바르게 키우는 방법을 알기위해 아른 아침부터 강의장을 가득 메운 부모님들의 열정이

강의를 하는 나를 절로 후끈거리게 만들었다.

가슴 가득 소중한 눈망울 들을 떠올리며  돌아오는데 남편이 시간에 맞춰 터미널에 나왔다.

 

남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누가 잘했다고 칭찬해주면 좋아서 헤벌쭉 웃는 여자,

텔레비젼에 라디오에 나오면 신난다고 자랑하는 여자

숫자 나이만 많지 정신연령이라곤 딱 막둥이 수준인 아내가

저 잘났다고 신나게 떠들며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힘은

 

TV에 안나오도록 조용히 사는 게 최고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보이지않는 곳에서 그림자처럼 역할해주는 남편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