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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情 不在의 아빠 覺悟


BY 일필휴지 2010-04-27

 

지난주 금요일에 집에 온 아들은 2박을 한 일요일 밤에 귀사했습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는 그래서 아들이 집을 나서

택시를 잡는 집 앞 횡단보도에까지 나가 배웅을 했지요.


아들은 오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다시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날은 아산에 가자꾸나. 그리곤...”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들과 함께 숙부님과

숙모님께 근사한 선물까지 안겨드리자고 말입니다.

“선물은 제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아빤 아무 걱정 마세요!”


아들은 숙소까지 제공해 주는 실로 고마운 회사로 그렇게 복귀했습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 도래하면 충남 아산에 갑니다.

거기엔 두 분의 유일한 집안 어르신이 사시는 때문이죠.


저의 부모님께선 너무도 일찍 이승을 버리셨습니다.

우선 어머니는 제가 생후 첫돌을 즈음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겨우 세 살이었을 적에 그만 그렇게 허허롭게 저 세상으로 떠나셨던 것입니다.


다 아는 상식이겠지만 신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에게 보낸 천사라는 엄마가 없는 아이의 삶은

정말이지 늘 그렇게 슬프고 아픈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은 5월 8일이 지금과는 달리 ‘어머니날’이었습니다.

하여 그날이 되면 학교에도 급우들의 어머니들이 학교의 초청을 받아 오셨지요.


하지만 저는 그날이 가장 싫었습니다!

왜냐면 저에겐 없는 엄마가 남들에겐 다 있는 까닭이었지요.


나이를 더 먹고 이 풍진 세상으로 나와 숱한 고생을

밥 먹듯 할 때도 역시나 엄마는 제 곁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제가 사는 게 힘들 때면

더 더욱 변함없이 눅진한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늘 습관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지요.

그럼 하늘의 별들도 제각기 무리를 지어 엄마 별 아빠 별,

아들 별 딸 별... 이렇게 오순도순으로 정겹기만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내가 못 받고 자랐기에 통한의 설움이자 한으로 자리매김한

모정(母情)의 모든 것까지를 주겠노라 작심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정말이지 금지옥엽의 사랑으로 키웠지요.

무심한 세월은 저를 지천명의 언덕에 올려놓았고

아이들은 20대 중반과 초반의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도 딸을 ‘아가’라고 부릅니다.

이는 딸이 여전히 그 시절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저만의 사시(斜視)때문이죠.


어버이날을 맞으며 다시금 제 마음의 옷깃을 여밉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에겐 엄마 못 지 않은

모정까지를 덩달아 아낌없이 퍼주는 아빠가 되겠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