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과 통음을 할 적의 일이다.
지인이 물었다.
“아드님이 취업을 한 지도 그럭저럭 세월이 지났지요?”
“세월이랄 것 까진 없고 다만 올 1월에 취업하였으니 얼추 다섯 달이 지나가는군요.”
지인이 그처럼 물은 건 지인 또한 자신의 자녀가
조만간 칼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는 취업전선에 나서야 하는 때문이었다.
지인의 입은 더욱 바빠졌다.
“저도 내년에 큰 아이가 대학을 마치기에 여쭙는 건데요,
그나저나 아드님은 월급이 얼마래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허걱~! 나도 모르는 걸 물으면 날더러 어쩌란 거유?’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들의 월급 명세를 알지 못 한다.
또한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왜냐면 아들이 받는 월급은 고스란히 녀석이
노력을 하여 받는 정당한 보수이기에, 또한 그건
엄연히 아들의 어떤 프라이버시 영역이란 사관의 발동 때문이다.
그렇긴 하더라도 명색이 아빠나 되어가지고 하나뿐인
아들의 급여 내역을 모른다고 한다면 아마도 아들에게
참으로 무관심한 아빠라는 나쁜 이미지를 줄까 싶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잘은 모르겠고... 여하튼 먹고 살 만치는 받는다고 합디다.”
한국인의 특성은 많다.
우선 자녀가 대학을 가면 어느 대학에
진학했느냐를 거의 꼬치꼬치로 따지고 든다는 거다.
다음으로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하기에 이르면 또한 어떤 직장이냐에 이어
반드시(!) 수반되는 질문이 급여의 수준까지를 가늠코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앞으로도 아들은 물론이요 향후 취업하게 될 딸에게 있어서도
“너는 급여가 얼마니?” 따위의 가히 전근대(前近代)적인 질문은 하지 않을 요량이다.
이처럼 ‘너른 마인드’(?)의 이 아빠 생각의 고착화는
자녀의 급여는 오로지, 그리고 전적으로 아이들이 수고하고
노력한 덕분의 반대급부인 까닭으로 구태여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결례라는 일종의 사상 때문이다.
즉 자녀가 현재 받고 있는 급여는 자녀가 소속된 회사에서
주는 것이지 내가 주는 건 아닌 연유라는 게 또 다른 이유다.
또한 가뜩이나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 있어 구태여
그런 지엽적 문제까지를 알고자 한다는 건 당사자나 부모 모두
‘피곤 스타일’이란 약간은 굴절된 시선이 작용하기도 한 귀착이다.
이순신 장군께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장렬히 운명하셨다.
그래서 말인데 아들이 월급을 얼마를 받든 간에 굳이
-“그걸 알려고 하지 말라.”- 이게 바로 평소 나의 굳은 다짐이다.
그러면 “네 월급이 얼만데 벌써 다 쓰고 돈이 없다는 거니?”
이딴 식의 지청구는 할 필요조차도 근원적으로 소멸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