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에티카'에서..--
최근 텔레비전의 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인문학자 강 신주의 '감정수업'을 읽고 있다.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이란 부제를 달고 스피노자란 거물을 불쑥 내밀고 있다.
고작해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던 나로선 충격이었다.
여러 검색을 통해 비로소 그가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란 별명을 얻었을만치 독특한 경지를 추구했고,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4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범신론을 내세우며 교회권력에 당당히 맞섰고,
근대 철학자 중 가장 난해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고,
강 신주의 손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감정의 윤리학자' 스피노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구해서 탐독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인간의 두 번째 감정의 얼굴,'자긍심'을 논하는 자리에 언급된 밀렌 쿤데라의 '정체성'의 두 주인공 장마르크와 샹탈의 이야기.
첫번째 감정의 얼굴 '비루함'에선 이반 뚜르게네프의 '무무'가 등장했지만,
알듯 모를듯 얼떨떨한 상태에서 만난 두번째 얼굴 '자긍심'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통해 쉽게 풀어주고 있다.
연상의 여인 샹탈과 동거를 하던 장마르크가 ,더이상 남자들로부터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연인 샹탈을 위해
스토커 역할을 하며 샹탈의 자긍심을 북돋워주고,그러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자긍심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
그런 자신의 자긍심없는 태도가 연인을 우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떠나고...
그렇게 헤어져 있는 동안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재회를 하며 사랑을 꽃피워 가는 과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곤 밀란 쿤데라의 발표작들을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정체성'을 못 봤다니...
허접하기만 한 나의 독서력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정체성'도 사서든 빌려서든 봐야지...;;)
장마르크는 자신과의 동거중임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남자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며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곤
나는 남자도 아닌가라며 불쾌해 하지만, 결국은 자존감을 찾는 대신 연인을 위해 스토커가 되어 작자미상의 편지를 샹탈에게 보내며
연인 샹탈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켜 주지만,그래서 그녀가 자긍심을 회복하여 자신의 강점과 매력을 발견해 가고,
눈에 띄게 밝아지고 활발해져 가며 자신있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샹탈을 보며 번뜩 불안해진 장마르크는 자신의 행위였음을 고백하지만
샹탈은 연인의 그런 노력에의 감동 대신 분노를 느끼곤 그의 곁을 떠나간다.
온통 자긍심으로 무장한 채...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자긍심이 없음으로 인해 그녀가 자신의 자긍심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칭송하고 환호하는 존재가 자긍심도 없는 비루한 존재였을 때 그 비루한 존재로부터 칭송을 받은들 무슨 기쁨이 있을 것인가.
결국은 장마르크도 자신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서로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다시 만나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러브스토리일지도 모른다.
누차 하는 말이지만 나의 목표는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것'이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행복하지 못했던,불안하기만 했던 어린시절을 겪어온 나로선 어려서부터 키워온 꿈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하나쯤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쓰러져가면서까지 치열함을 추구했다.
심지어는 나아닌 가족 중 누군가가 신체의 일부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줄 수 있노라고 생각하며 헌신에 헌신을 거듭했다.
스스로를 꾸미고 가꾸며 자긍심을 키우는 것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칭송하고 환호했고 열광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오히려 질려버리곤 하는 그들을 보곤 절망하고 화를 냈었다.
자존심만 살아서, 늬들이 뭔데 나의 이런 헌신을 받고도 인정해주긴 커녕 원망을 하느냐며 분노했다.
결국은 몸과 마음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채 홀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망연자실 떠나가는 그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당시로선 이런 이야기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정도로 일로매진이었다.
무모하기만 했던 어리석은 희생이엇던 것이다.
아무도 원치 않았고,스스로에게도 상처만 안길 뿐인 어리석은 희생.
하지만 마무리는 '정체성'과 다르다.
글쎄,아직도 샹탈이란 연인이 아닌 아이들과의 재회는 꿈꾸고 있지만,전처와의 재회는 꿈꾸고 있지 않으니...
물론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피차 성인으로서 굳이 그래야 할까 싶은 것이다.
부디 행복을 찾아서 훨훨 날아보길 바랄 뿐.
나는 밀란 쿤데라가 주인공으로 삼고 싶을만치 근사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자존감 자체를 부정하자는 건 아니지만 여튼 난 더 이상 이성간의 사랑을 하고 싶진 않은 것이다.
딸들과의 친구같은 관계쯤을 원하고 있지만,결국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굳이 매달리지 않으리라.
그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당당하게 자유를 만끽하며 살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자긍심을 찾아가다보면 그리움이 불쑥 다가올지도 모르겠으나 그리움으로 만족하고 싶다.
지나온 일들이 너무 가슴 아팠으므로...
철저하게 나자신만을 사랑하며 ,나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 틀안에 이미 가족은 없다.
부모,형제,딸들에의 도리는 하겠지만 더 이상 내 발목을 잡을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인생공부나 원없이 하다가 죽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강 신주의 '감정수업'을 강추한다!아직 다 읽지도 않은 책이지만...^*^
프롤로그에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감각들이 생성,소멸,변화를 보여 줄 때,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내걸고,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자긍심'에서부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비루함'까지 마흔여덟 가지 감정의 전모를 파헤치는
'감정의 윤리학자스피노자와 함께 내면의 여행을 떠나자고 이성에 앞서 존재했던 감정의 본질을 추구해가잔 강 신주.
...감정을 죽이는 것,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지금 우리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졌다.그만큼 우리에게 행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삶의 조건이 악화된 만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쉬우니까...슬픔,비애,질투 등의 감정도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지금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에,내일을 더 간절히 기다릴 수 있으니까,내일은 행복의 감정에 젖을 수도 있다는 설레는 마음,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힘이 아닐지....
삶의 의미를 ,원동력을 감정추구,감정회복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당연한 철학이 왜 이리 낯설어 보였던지...
하지만 하나하나 감정의 얼굴들과의 낯섦을 극복해가며 ,객지만을 떠돌며 황량해진 나의 가슴이 고향을 찾은 듯 푸근해지고 있으니...
그의 간단명료하면서도 통쾌한 삶 논법을 권하고 싶은 것이다.
스피노자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