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의 길은 영광의 길이었다.
--테니슨--
앨프리드 테니슨(1809~1892) 영국.계관시인.
신설된 로스 그래머 스쿨에서 4년 간 공부를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만 두고,스카이트클리프 스쿨 등을 거치며 문학교육을 받고,
1827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서,'케임브리지 사도들'이란 비밀단체에 가입해 혁명을 꿈꾸기도 했다.
역사가 헨리 핼럼의 천재 아들인 아서 헨리 핼럼을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됐으며 ,테니슨 생애에 가장 깊이 있는 교제를 갖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핼럼이 갑자기 죽자 크게 상심하여 절망적인 시기를 맞기도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형제들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연인들과의 순탄치 않은 사랑으로 심리적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1833년 '샬롯의 숙녀'를 발표했다가 혹평을 받게 되고 ,10년 간 침묵하기도 했다.
1847년 ,서사시 '공주'를 발표하고 ,1850년,윌리엄 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 시인이 되며,그해에 결혼을 했다.
'인 메모리엄'을 출판하며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계관시인으로 추천받게 됐고,시집 '모드' 등을 발표하여 당대 최고 시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1884년 남작에 서임됐다.(위키백과,브리태니커)
어려운 가정형편과 크고 작은 시련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생애를 살던 그였지만,열 살이 되기 전부터 조숙하여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던 테니슨은 ,
인생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을 노래하며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게 되고,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평탄한 삶이 과연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해준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에서 '행복은 의무이다.'라고 선언을 하는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들은 이미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고,기회를 맞고 있으며 ,도전을 할 수 있는 의욕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조건은 다 갖춘 것이라고 한다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까?
의무와 권리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리라.
살아 있다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 할 의무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맞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도전의 기회를 누리기 위해선 준비를 하고 실패의 위험을 떠안을 의지를 갖춰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린 의무는 안지 않고 권리만 누리고 싶어 하는 뻔뻔한 존재는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할 것이다.
권리란 앞면을 많이 누리고 싶다면 뒷면의 의무도 함께 커진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50원짜리 동전 만큼의 권리만 원한다면 그만큼의 의무만 수행하면 될 것이고,500원짜리 동전 만큼의 권리를 원한다면 그만큼 커진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권리는 500원짜리 만큼 누리고 싶어 하면서 의무는 50원짜리 만큼만 수행코자 하거나 아예 무시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 제작돼서 앞면만 있는 , 버려져야 할 동전을 훔쳐서 동전으로 써먹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을테니 잘못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권리부터 누리고자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서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보다 큰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 기득권층이란 무리들이 보이는 행태가 그런데...
권리는 최대한 누리고 싶어 하고,의무는 최소한으로 그치고 싶어 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현실은 혼돈의 늪으로만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도둑놈 심보를 가진 자들로 이뤄진 기득권층들의 작태의 영속은 사회의 활력을 좀먹어 왔고,
급기야는 너도나도 도둑놈이 되고 싶어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니...
'김 영란법'이 어제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공무원과 언론인 등 공직자들의 부정청탁과 그에 대한 댓가로 금품 등을 수수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취지의 법안인데,
그 가족들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전 민중의 절반 가량이 해당되는 것이라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라며 실행여부를 보장할 수 없다는 씁쓸한 소리가 들린다.
끔찍하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1퍼센트,잘 해야 10퍼센트 내외라고 여겨왔던 기득권층의 비중이 50퍼센트라는 것도 그렇고,
부정청탁과 뇌물수수를 금한다는 사회정의에의 저항이 음으로 양으로 거세지고 있다는 소리도 가히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둑놈 공화국 맞고,부정부패 공화국 맞는다.
반만 년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의 현실의 모습은 부끄럽기 그지 없다.
그것이 어느 한 부류에 그치지 않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렇다는 현실은 참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데다 하나같이 그런 도둑놈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몸이 닳아있다는 것은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수천 년의 세계사를 통틀어서 이렇게 부정부패한 사회가 망하지 않은 사례가 단 하나라도 있던가?
대오각성이 절실하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는 과연 누리고 있는 권리 만큼의 의무에 충실한지를 따져 보자.
의무란,'그 근원인 규범에 따라 도덕적 의무,종교적 의무,법적 의무 등으로 구별된다.
이 중 법적 의무는 법률상의 구속,즉,의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법에 의해 강요되는 구속이다.'라고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은 알려준다.
복지증진을 요구하면서 부담 증가에는 반대하는 것은,권리는 500원 만큼 누리고 싶지만 의무는 50원 만큼만 이행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난 의무에 충실했으니 내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공공시설 등을 함부로 사용하고 망가뜨리는 사람들도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난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니 거짓말 좀 해도 되고,치외법권을 마음껏 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난 마피아니까 도둑질은 당연한 것이고,
비난 받아야 할 것은 크게 도둑질한 놈들이지 ,적게 도둑질한 나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만드는 짓이다.
최근 지성인 하면 떠오르는 학계 인사들이나 종교계 인사들이 연구비를 횡령하고 ,비과세의 열매로 사치를 누리며 또 다른 마피아가 되는 것을 보면서 ,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로 누리는 혜택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안 하거나 음성적인 수입 올리기에 혈안이 돼 있는 걸 보면서 ,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썩었음을 알게 되며 아연실색하게 되는데...
보라!들으라!
의무의 길은 영광의 길이란 테니슨의 말을...
누리는 권리보단 조금이라도 더 의무 수행에 몰두하는,얼마간은 손해를 보고 살겠다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영광스러울 수 있다.
이익만 보고 살려다 보니 거짓말을 일삼게 되고,들킬까봐 불안하고 ,권리를 빼앗길까봐 두렵지 않은가?
독립투사들의 희생 덕분에 독립된 나라에 살면서 ,그들의 반대의 길을 걸은 매국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민주열사들의 희생에 의해 이만치라도 자유를 누리는 것임은 까맣게 잊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독재망령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비인간적인 행위이자 태도라고 생각지 않는가?
우리는 조상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다.
그 빚은 후손들에게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야 한다.
즉,적극적으로 사회발전에 동참해야 하고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듯 희생까지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영광스럽게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보고 있잖은가?
탈세,편법,불법,노동착취의 귀재인 재벌 2세가 마음껏 죽지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독재의 귀재 김 일성이 ,박 정희가 무덤 속에서까지 몰매를 맞고 있는 것을...
그 자손이 결코 행복해 하지도,떳떳해 하지도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찬란한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주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