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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시소(seesaw)다!


BY 미개인 2015-01-15

시련이 사람을 만든다.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세상은 우리의 스승이다.

                                              --존 키츠--

 

존 키츠(1795~1821) 영국.낭만주의 시인.

셸리,바이런과 함께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전성기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으로서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1804년 아버지를 잃고 ,1810년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죽게 됐다.

1814년까지 외과 의사의 조수로 일하다가 ,지역병원의 학생이 됐으며,그 무렵 호메로스,스펜서 등을 애독하며 시작(詩作)에 심취하게 된다.

1817년 첫 시집 '존 키츠 시집'을 출간했고,1818년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우화 서사시 '엔디미온'을 간행했지만,잡지에서 혹평을 받았다.

낙심한 키츠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최고봉인 벤 네비스 산 정상에 오른다.

이 때의 경험은 그를 정신적으로 성장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여행 중 그는 결핵 증상을 보여 여행을 단축하고 귀가했는데,그 해 동생 톰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계속해서 중세취향을 살린 '성 아그네스 축일의 전날 밤', 하이페리온의 몰락' ,'나이팅게일에게' 등을 썼고,

건강 악화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요양을 하며 로마의 스페인 광장 근처에 머물렀다.

1819년 '성 아그네스의 저녁', '가을에', '무정한 미인', '그리스 항아리에 대한 송시' 등 대표적인 그의 송시가 발표됐다.

건강의 악화로 약혼자 패니 브론과의 결혼을 포기해야 했고,실의에 빠져 친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그의 묘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을 가진 자 여기 잠들다'라고 쓰여있다 한다.

그의 생애 동안에 그의 시는 비평가들에게 높게 평가받지 못 했지만,그의 평판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

사후 많은 후대의 시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알프레드 테니슨과 윌프레드 오웬 등이 그들이다.(위키백과)

 

시련의 시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부모를 일찍 잃고,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으며,

스코틀랜드 여행 중 알게 된 여인과 약혼을 했지만 건강 악화로 결혼에 이르진 못 했고,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은,비운의 시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운명을 원망하진 않았던 것일까?

자신에게 시련만 안긴 세상을 스승이라 칭하며 ,세상으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시련에 맞서 싸우며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니...

그에 비하자면 시련이랄 수도 없는,스스로 자초했다 할 수 있는 자그마한 고통쯤에 엄살을 부리며 불행해 하는 사람들은 각성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너무 시련이 없어서 사람답게 살 수가 없노라며 스스로 찾아 불의와 맞서 싸우는 시련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야지 않을까?

불의는 팽배할대로 팽배해 있지만,거기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시련인 시기에 살고 있다는 각성이 아쉽기만 하다.

 

나는 지금껏 나의 삶을 시련의 삶이라 생각해왔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그런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왔기에 ,비록 지금의 모습이 초라할지라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고 당당해왔다.

그러나 존 키츠의 저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워지며 낯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

스물다섯 살 이전에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도 있었는데,그리고 그 짧은 생애에 큰 업적을 남기고 갔는데,

그보다 두 배를 넘게 산 나는 과연 얼마나 성숙했고,무엇을 남겼기에 ,감히 미개인이라고...

미래를 개척하는,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인간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 고착된 범죄인 집단인 친일 매국노들을 성토하며 그들의 악행을 알리는 데 애쓰고 있고,

관피아 등 기득권층들의 비리를 고발하며 시련을 초래하면서 조금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하며 시련을 자초하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안타까워 하는 가족들이나 지인들도 많지만,오히려 더욱 분발하고 싶으니...

그리고 더욱 분발해야 할 이유를 오늘 찾게 됐으니...정말 다행이다.

 

시련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물론 시련을 극복하고 났을 때의 일이긴 하겠지만....

시련에 굴복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사람은 커녕 짐승들을 부러워 하는 존재로 전락을 해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비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테니...

시련을 대하는 태도를 ,나를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신의 은총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꿔볼 만하다.

그리고 그 시련이 주기적으로 닥쳐주길 바라야 할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고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올라서서 탄탄대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작태를 보면 대다수가 인간 이하의 행태를 보이는 것만 봐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최근 본 책에서 인생은 시소(seesaw)라고 한 말을 봤다.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얼마 전 국내의 한 강연자로부터 시계추와 같다고 한 말에 적극 공감을 한 적도 있지만 ,시소야말로 인생을 표현하는 데 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힘을 줬다  풀었다 하면서 오르내리며 눈높이의 저쪽을 봤다가 못 봤다가 하는 게 시소인데...

내가 좀 크고 무겁다고 힘을 주지 않아도 아래로 내려와서 상대편을 높이 올려둔 채 약 올라 하는 걸 보며 깔깔댔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고 있으면 시소와 상대편에 가려져 앞을 볼 수 없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러나 살짝 힘을 빼고 땅을 딛고 올라서면 가벼운 상대도 아래로 내려와 땅을 딛을 수가 있게 되고 

나의 시야도 훤히 트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해야 둘 다 재미 있을 수 있고,둘의 관계도 원만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삶에 있어서도 그처럼 시련과 행복이 교대로 오르내릴 때라야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을 수 있으며,넓은 시야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난 행복하니까,난 돈이 많으니까,난 권력이 있으니까 ...하며 편안히 안주하게 되면 시야는 늘 가려지게 되고,따분하기만 할 것이다.

살짝 힘을 빼거나 나의 것을 상대에게 나눠주며 균형을 유지해야 오르거니 내리거니 하면서 즐거워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땅을 딛고 있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이고,부와 명예라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시련이고,불행이고,궁핍이며 ,곤궁이랄 수 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와 있으면 시야가 좁아지면서 인간적인 도리에 소홀해지게 되고 자주 비난을 받거나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으면 잠시 불안할 수는 있지만 훤히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며,

기득권의 뒤통수까지를 목도하게 되면서 겸손해질 필요를 느끼게 되고 한층 인간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흔히 인생을 산행이나 마라톤에 비유해 왔는데,그리고 시계추에 비유한 것을 보고 공감을 해왔는데,

앞으론 이 시소를 자주 거론하게 될 것 같다.

비슷한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올라가기 위해선 상대를 내려줘야 하니 땅을 살짝 박차줘야 할 것이고,

내려가기 위해선 상대의 그런 노력에 얼마간 부응하며 끙~하고 힘을 주는 정도의 발버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 피차가 만족하며 싸울 일도 ,질시를 할 일도 없어지면서 ,

너와 나는 물론이고 사회전체가 평화로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아닌가?

시런에 처한 사람은 좀 더 애를 써가고,기득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나누고 배려를 하면 피차가 만족스러워지는 것이다.

 

"인생은 시소다!"

기막히게 멋진 말이 아닌가? 

자주 자기가 서있는 위치를 확인하며 애를 쓰거나, 나누고 배려를 해가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

기득권이면서 나누거나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도 꿀불견이지만,시련에 처해서도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고 도움받기를 당연시 하는 사람도 얄밉다.

꼴불견이 되는 것도,얄미운 사람이 되는 것도 지양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