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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은 사랑을 키운다!


BY 미개인 2016-04-11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헌신에 의해 사랑은 자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 영국.소설가.

어려서부터 폐병을 앓은 그는 야외와 바다,모험을 사랑했으며,독서를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데,그것이 그의 소설을 쓸 때 배경이 돼 주었다.

공학과 법률을 공부했고 변호사가 됐으나 이야기 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자기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유부녀 패니 오스본을 만나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그녀가 이혼하자 결혼을 한다.

1880 년 이후 7 년간 부부가 함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닌다.

이후 요양이 필요하여 뉴욕 주 사라나크 호의 요양소로 들어갔다가,건강을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남태평양을 여행하다 남양 제도에 정착하기로 하고,사모아의 아피아 근처에 있는 숲에 큰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경작을 하며 섬의 정세에 관한 활동을 했으며,그의 이해와 친절,포용력 덕분에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그가 발작을 일으켜 별세하자 추장들이 그를 바에아 산 정상에 안장해줬고,묘비명엔 그의 시 '레퀴엠'이 새겨져있다.

'여기,그가 애타게 기다려온 곳에 잠들어있다.본국은 항해자,바다가 고향,그리고 사냥꾼,언덕이 고향'

저서로 '신 아라비안 나이트', '젊은이를 위하여',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등의 걸작을 남겼다.(위키백과)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등 사랑에 대한 명언은 많고도 많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헌신의 산물이란 저 말은 참으로 깊이 와 닿는 말이다.

부모님이 자식을,자식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헌신의 본보기가 아닐까?

그런데,사실 내리 사랑은 흔하디 흔하지만,오름 사랑은 귀해져만 가는 것이 심히 안타깝다.

그러나 그리 잊었던 오름 사랑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내리 사랑으로 변하는데,그때서야 오름 사랑에 관심을 가지게 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돼도 별로 달라지지 않아 ,올려야 할 사랑은 하지도 않으면서,위에다 대고  더 내리라고만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위로,아래로 가는 사랑이 얼마간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중간의 부부간의 사랑도 무르익을텐데,그게 잘 안 되다 보니 이혼천국이 돼 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관이 어떨까?

좋아서 ,날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서,멋져서 안 보곤 살 수 없어 결혼을 한다는 사람들이 절대다수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결혼은 얼마 가지 않아서 비극으로 변하게 됨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지?

내가 헌신을 하고 싶어서,그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려 헌신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사람?

전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아주 흔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매스컴으로 그런 순애보를 접하노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서러움이 밀어닥친다.

그런 사랑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결혼을 꿈꾸며 쾌락을 포기하고,자유를 포기하며 ,아름다운,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마음 먹고 1년 여를 헤매다 ,

나를 위해 헌신해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났고,나 역시 그를 위해 헌신을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결혼을 했다.

5년쯤의 갈등 조정 기간을 감안하고 대들었는데,사업과 함께 시작된 우리의 결혼생활은 ,시작하자마자 갈등이 불거졌다.

사사건건 오해를 하고 ,헌신 따위 언제 생각했느냔 식으로 막바지를 향해 치닫다가 20년도 못 채우고 파경을 맞았는데...

그 모멸감은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고,거듭 바보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난 후 1년 가까이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다 사랑이 부모 자식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연인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면서 살아났고...

 

왜 남(?)들에게만 헌신을 하고자 했는지,그게 오히려 그들에게 부담이 됐다는 걸 깨달았지만,되돌리고 싶잖았고,

그래서 찾은 길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나의 헌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헌신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게 됐고,나를 위해 규칙적인 삶을 버리고 나서는 짓(?)도 자주 하는 등,삶의 중심에 나를 세워두고 ,

나 자신에게 헌신을 하다 보니 비로소 행복해지기 시작했으며,나의 헌신을 원하는 대상들도 찾아다니게까지 되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내가 그동안 가족들에게 헌신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그들의 입장에선 집착 정도로 보였으리라.

그래서 싫었으리라.

여튼 지금은 서로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나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한 친구가 스스로는 불행해 하면서도 자신이 참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면 잘 사는 것 아니냐며 항변을 해 왔다.

그러면서도 이젠 늙어 가니 사람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갈피를 잡을 수 없다며 힘들어도 하는 걸 봤는데...

조언한답시고 꼴값을 떨다가 피차 건너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너무 늦지 않아서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길 바라면서 관심을 끄게 됐는데...

뭐라도 자신을 위해 하면서 꿈도 꾸며 행복해 하길...

 

또 최근 한 모임에선 스스로 짠 틀에 부담을 느끼며 벗어나고파 하는 사람들도 만나 봤는데,

그러면서 난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됐지만 ,안타까워서 나의 부끄러운 경우를 참고하라고 말해줬다.

가정은 작은 우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어느 쪽에서든 집착이라 생각하게 되면 어긋나게 마련이지 않을까 하는 나의 의견도 덧붙여서...

참으로 행복해 보였던 그들도 어쩌면 다 똑같은 고민을 하고 사는 것인지도...

그래서 '204호나 708호나 ...'라는 말이 있는 것인지도...

 

헌신은,사랑은,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반대급부를 생각한다면 치사한 일이 되고 말며,결국은 배신감까지 느끼게 된다.

헌신을 하고 ,사랑을 하며 만족하고 말아야지 ,내가 이리 했으니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 반드시 배신을 당한다는 말이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보답을 받으면 횡재를 한 느낌이겠지만,기대를 했다가 받지 못하면 배신감이 느껴질 터.

그리고 실제로도 전자의 경우엔 보답을 받지만,후자의 경우엔 거의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가장 인간적인 삶의 비법이며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