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은 옛 동료들이 변절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김상덕은 한때 그토록 강건했던 친구들이 왜 시들어버렸는지 따지고 싶었다. 이승만의 회유에도 끄떡없었다.
고령은 경상북도의 작은 군이야. 대가야 시절의 유적이 즐비하게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
가야금의 명인 우륵이나 고려 시대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가로막았던 의병장 김면 등 여러 인물을 배출했어. 임진왜란 당시 영남 3대 의병장으로 꼽힐 만큼 맹활약했던 김면은 병약한 몸으로 전장을 누비다가 병들어 쓰러지고 말았어. 그의 유언은 사뭇 비장해.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도다(只知有國 不知有身).”
김면과 비슷한 말을 되뇌며, 그 심경을 절절히 느끼며 평생을 살았을 또 하나의 고령 출신 위인이 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그는 소작농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우다가 늦깎이로 신학문을 익히게 됐어. 1912년 스물두 살에 고령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서울로 상경해 경신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선택은 김상덕의 삶을 크게 좌우하게 돼. 경신학교는 독립운동가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거든. 우사 김규식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이 학교에서 성장했고 도산 안창호도 경신학교를 거쳐 갔단다. 1917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김상덕은 일본 유학 중에도 경찰 보기에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 누구 못지않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즉 항일의식 충만한 조선인으로 성장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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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평양 재북인사릉을 찾은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가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분위기는 ‘반일’ 그 자체였다고 해. 1912년 조직된 유학생 학우회는 조선인 유학생이라면 무조건 가입해야 했고 가입하지 않으면 바로 ‘일본놈의 개’라는 호칭이 날아갔다는구나. 1919년 1월6일 학우회는 조선 유학생 웅변대회를 개최한다. “연사로 나선 서춘, 이종근, 윤창석, 김상덕 등은 세계 사조에 따라 또한 민족자결의 대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우리 젊은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불을 뿜는 듯한 열변을 토하였다(김삼웅, <김상덕 평전>).”
김상덕은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조선 독립선언의 대표로 추대됐지.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던 순간, 일본 경찰은 아우성을 치며 행사장에 난입했다. 그 가운데 조금은 서툰 일본어로 “고이쓰(이놈)! 아이쓰(저놈!)” 악을 쓰며 주동자들에게 손가락 총을 쏘아대는 사람이 있었어. 조선인 형사 선우갑이라는 자였다. 선우갑은 후일 일제의 밀정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언론인 행세를 하며 일제의 논리를 전파하게 되는 악질 친일 부역자였지.
의열단 김원봉에게 사과 받아내기도
1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김상덕은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일원이 된다.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대회에 한국 대표 5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했고, 1924년에는 상하이청년동맹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게 되지.
이 조직은 의열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의열단의 개인적 암살, 폭력 투쟁에 비판을 제기했는데 이에 분통을 터뜨린 의열단장 김원봉이 상하이청년동맹회의 윤자영을 찾아가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져. 이때 천하의 김원봉을 찾아가 사과를 받아낸 게 김상덕이란다.
김상덕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격정적이라기보다는 타협적이고 설득력을 갖추었고 계급해방보다는 민족해방에 무게를 더 두고 있던 민족 좌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해(김희곤, <김상덕의 독립운동>). 만주로 건너가 민족 유일당 건설 운동에 매진하다가 일본의 만주 침공 이후 다시 중국 내륙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임시정부와 합류했으니 그야말로 중국 대륙이 좁다 하고 돌아다닌 셈이지. 수백 년 전 그의 고향 사람 김면이 말한 것처럼 ‘나라가 있는 줄은 알고 내 몸 있는 줄은 모르면서’ 말이다.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
자기 몸이야 모르면 그만이지만 그는 가족까지도 ‘몰라야’ 했어. 그가 만주에서 활동하던 무렵, 어려서 결혼한 후 남편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시부모를 봉양하고 살던 아내가 남편을 찾아왔다. 이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아이 셋을 낳으며 함께했지만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이어진 피란길에서 지쳐 쓰러져 영영 세상을 떠났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딸은 굶어 죽었어. 심지어 피눈물을 흘리며 남은 두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기도 했으니 그 심경을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 아들 김정륙이 아버지의 고달픈 모습을 회고한 대목이야. “아버지는 임시정부 일을 마치고 한 달에 한 번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밀린 빨래를 하느라 바빴다. …나는 아버지가 빨래를 하는 동안 강가를 휘젓고 뛰어놀았다. 그러다 지치면 빨랫감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버지 코끝에는 항상 말간 콧물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철없는 다섯 살 개구쟁이 눈에도 아버지의 옆모습이 그렇게 측은해 보일 수가 없었다.”
김상덕이 그렇게 몸과 마음을 던져 수렁을 헤쳐 나가던 무렵, 그의 옛 동료 상당수는 변절했어. 2·8 독립선언을 쓴 이광수는 친일파를 넘어 일본인이 되어갔고, 또 한 명 서춘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고 있었지. 김상덕에게는 그들과 2·8 독립선언 당시 자신을 지목하며 욕설을 퍼붓던 조선인 형사 선우갑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지도 모르겠구나.
해방 이후 김상덕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건설에 매진하고 그 위원장까지 맡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야. 한때 그토록 푸르게 강건했던 친구들이 왜 그렇게 시들어버렸는지 따지고 싶었을 것이고, 선우갑 같은 악질 친일파들을 처단하고 싶었겠지. 최소한 그래야, 남편 얼굴을 겨우 몇 년 보고 죽어간 아내와 굶어죽은 딸에게 체면이라도 세울 수 있다 여기지 않았겠니.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서 반민특위를 그만두면 장관 자리를 보장한다고 회유해도 끄떡없이 버텼던 것은 그런 간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시사IN> 제604호 “나경원을 보면 이광수가 떠올라” 기사 참조).
그러나 그의 의지도 헛되이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인 친일 경찰들에 의해 처참하게 와해되고 말았어. 반민특위 위원장에서 물러나며 남긴 김상덕의 절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눈을 찌르고 가슴을 저민다. “한 난관을 피하면 앞으로는 평탄한 길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난관을 피하면 피할수록 오는 것은 더욱 큰 난관이었습니다.” 2·8 독립선언 후 상하이로 망명할 때만 해도 그는 몇 년 안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고향 고령 땅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해로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거야.
그가 고향에 돌아가기까지는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일제에 붙어먹은 사람들이 되레 큰소리를 치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기막힌 상황에 이르렀으니(김상덕은 친일파 경찰이 작성한 암살 목록에 올라 있었단다), 그의 인생은 ‘피하면 피할수록 오는 난관의 연속’이랄밖에. 이후 김상덕은 자신의 모교 경신중학교 교장을 지내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난관’은 계속되고 있구나. 김상덕이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지 꼭 100년이 흘렀건만, 우리나라 제1 야당 원내대표가 “반민특위가 국민들을 분열시켰다”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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