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윤세주 선생(1901.6.24~1942.6.3) 의열단 창설멤버, 일본군 40만과 최후 결전! 윤세주 선생은 의열단의 강령 및 목표에 따라 조선총독부 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 투척자를 물색하게 됩니다 정의롭고 열정적이었던 당시 19세의 선생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계획을 진행하던 중 정보가 누설되어 국내 동지 50여 명과 함께 처음으로 체포됩니다. 선생은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버티어냈고 1927년 출옥한 후 신문사 기자 주식회사 사장 등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독립운동과는 더이상 관련없는 사람인 것처럼 조용히 지내다 19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이동합니다. 이 시기 선생은 치밀하게 독립운동에 대한 전략을 수렵했고 어떻게하면 의열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즉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으로 싸웠으나 이제는 혁명적인 인생철학과 과학적 혁명 이론으로 무장하여 실수 없는, 실패없는 승리를 위한 혁명운동을 하기로 다짐합니다. 1932년 10월. 선생은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단에 입교하여 제 1기로 졸업합니다. 당시 해외 독립군 단체들은 노선이 통일되지 않아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입장이었고 선생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며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통일연맹을 결성했습니다. 윤세주 선생은 통일연맹에서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윤기섭 선생등과 함께 고위 간부로 선출되었고 그토록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하나의 통합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민족혁명당이 일본군에 비해 무력으로 위협받을 수 있는 점을 지적하며 조선의용대를 편성 지휘하는 계획을 제안합니다. 선생은 실제로 조선의용대 핵심부서에서 공작활동을 벌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일제의 편이 되어 갔으며, 독립운동의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선생은 이 시기에 이르렀을때 말로만 고민하지 않고 직접 총과 칼을 잡고 나섭니다. 직접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여를 한 것입니다. 수많은 전투, 그리고 그렇게 키워진 한국과 중국군의 동맹력은 안타깝게도 훗날 6.25 전쟁시 북한군을 중국군이 '의리' 라는 이름으로 지원해주는 근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의 한중연합작전으로 일본과의 전투에서 굉장히 많은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당시 수많은 전투를 치뤘던 의열단과 광복군 출신들이 북한에 체류하게되어 6.25 전쟁당시 남한과 전력에서 시작부터 근본적인 큰 차이가 났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병사나 간부들의 휴가여부를 떠나서도 이미 이길 수 없는 전력과 전투경험이 있었다는 말이죠. 윤세주 선생은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팔로군과 함께 가장많은 전투를 치룹니다. 선생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전투에서 본인이 직접 총을들고 가장 앞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1942년, 2월 일본군 4만명이 선생을 붙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선생의 부대가 주둔해 있던 태행산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4만명으로 의열단 창시자중 한명인 윤세주 선생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5월에 이르러서는 일본군 20개 사단을 총 출동시켜 40만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해옵니다. 놀라운 것은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윤세주 선생의 조선의용군 병력은 3~4천명 수준이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존재감과 능력을 가진 지휘관이었는지 가늠이 됩니다. 5월 29일. 운명적인 전투가 일어납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윤세주 선생과 선생의 부대원들. 선생은 마지막까지 탈출로를 확보하려 노력했고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였으며 명령하였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던 현장에서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기습 선제공격을 하였고 나머지 대원들이 탈출할떄까지 사수하는 작전을 펼쳤는데 기습 선제공격을 한 소수정예의 요원에 윤세주 선생이 직접 포함되어있었고, 작전개시 5시간 만에 탈출로를 확보한 조선의용군은 탈출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윤세주 선생은 작전도중 적탄에 맞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총탄을 맞은 그 자리에서 3일간 치료도 못한채 정신력으로 버텼으며 3일이 지난뒤 선생을 찾으러 목숨을 걸고 현장에 돌아온 부하들에게 다음과같은 말을 남긴 직후 서거하셨습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동지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 당시 선생의 나이 41세였습니다. 윤세주 선생, 장군이라 불리는 독립운동가가 서거하셨을 때 그의 부대원 모두가 통곡하였고 그의 죽마고우이자 의열단을 함께 만든 유년시절 죽마고우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은 그 어느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어 흐느끼며 울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의지가 그분의 후손이 지금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