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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선물


BY 미미까미 2020-06-17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1911.12.29~1943.6.17)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1911.12.29~1943.6.17) 중국 항일전선에 10년간 불지핀 조선의용대원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마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의용대 깃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 조선의용대 군가 中 이원대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바로 다음해에 태어났는데 어릴적부터 호기롭고 정의로운 성품에 외골수적인 면이 있는 사내였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일제의 수탈에 괴로워하고 억울해하는 동포들,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고 식민지 상황에 대해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뛰어들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며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은 평소 친하게 지내온 이웃 동네 안병철 선생의 권유로 1933년 8월 부산에서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안병철 선생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자면, 이육사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합심하여 만든 조선혁명군 간부학교를 1기로 졸업한 인물로서,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리는 이 학교를 졸업후 2기 학생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스카우터였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연결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며 이원대 선생은 독립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이원대 선생은 의열단 간부학교에 2기 입학생이 되어 6개월간 군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각국 혁명사 등을 집중적으로 배웠는데 졸업을 앞 둔 상황에서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14명의 2기 입학생 동기들과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습니다. 한인특별반은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도시락 폭탄 계획을 설립했던 단체입니다. 윤봉길 선생의 상하이 의거는 당시 중국인들에게도 적이었던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의 불꽃이 되었고 한인들에대한 인식,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 및 한중연합 항일작전까지 이어지는 큰 변화들을 전부 일으키게되는 역사적 전환점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33년 김구 선생과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 주석의 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중국중앙육군사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만들어 한국청년들을 독립군 장교로 훈련 배출하는 계획이 결정되게됩니다. 김구 선생은 이원대 선생이 이 새로운 역사적 흐름에 적합한 인물로 보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 후 선생은 민족혁명당의 특파공작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중국 경찰과 협조하여 남경, 상해 등지에서 일본군 정탐활동 및 일본인 관리 암살, 일제 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했습니다. 민족혁명당이 조선의용대로 개편되게 되자 의열단장 김원봉 선생은 민족전선의 맹렬한 청년장교들을 주멤버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고 중국정부에 정식 제안하여 승인을 얻은후 한중 연합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선생은 약 50여 차례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고 1942년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도발후 중국 팔로군 소탕작전을 시행하던 중 태항산맥에서 벌인 마전 전투가 가장 유명합니다. 여기서 선생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압박해 오는 일본군에게 오히려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탈출로를 마련한 뒤 중국 팔로군과 함께 역포위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혀 큰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1942년 7월경, 화북 조선독립동맹이 이루어지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들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선생은 격전을 벌이던 도 중 생포되었고 석문헌병대라는 곳에서 매일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다 체포된지 3개월이 채 안된 시점 32살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참고자료 https://youtu.be/cwBPqSlZB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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