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을 뚫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3월의 봄날 잔잔하지만 애틋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다.
광화문 흥국생명건물 지하에 있는 시네큐브는 대중성이 강한 영화도 상영하지만 작품성이 있는 수준작을 주로 상영하는 공간인 듯하다.
아름다운 프랑스의 노르망디 전원에서 소를 키우며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브리짓(이자벨 위페르)와 자베르(장 피에르 다루생)은 곡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 하나를 둔 부부로 소녀같은 감성을 지닌 브리짓과 다소 무뚝뚝하고 일방적인 남편 때문에 가끔 감정이 상하긴 하지만 무난하게 살아간다. 자베르는 자신이 키우는 소가 우량소로 상을 여러번 받을만큼 자부심 강한 목장주이다.
어느 날 이 부부의 바로 이웃에서 생일파티가 열린다. 마침 농장에서 송아지가 태어나고 이를 보기위해 몰려든 이웃손님들 중에 잘생기고 매력적인 청년 스탠을 만나 잠시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라이터를 빌리러 브리짓의 집을 찾아온 스탠은 그녀를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망설이던 브리짓은 온통 젊은이들밖에 없는 파티에서 의외로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서로 마음이 통한 것을 느낀 브리짓은 그가 아메리칸 어패럴이란 매장에서 근무하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의 지병인 피부습진을 치료하러 파리로 간다는 명목으로 3일간을 외출을 나선다.
아무 의심없이 아내를 파리로 보낸 자베르는 아내가 예약한 의사가 지금은 퇴직을 했고 대체의사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뒤를 쫓아 파리로 향한다. 브리짓은 설레는 마음으로 파리에 도착하고 스탠이 근무한다는 매장을 찾아가 마치 우연인 듯 그에게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글쎄 내가 보기에도 스탠은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왠지 능글거리는 것이 천상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고 다소 경박한 느낌의 젊은이일 뿐이다.
그가 퇴근할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브리짓은 동생의 아이를 봐줘야 하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할 수 없다는 그와 함께 그의 동생의 집으로 향한다. 졸지에 애보기에 나선 두 사람.
로맨틱한 저녁식사와 데이트를 꿈꿨던 브리짓은 대마초를 말아피우고 경박스럽게 행동하는 스탠의 행동에 놀라 집을 뛰쳐나오게 된다. 하지만 호텔에 돌아와보니 핸드폰을 두고온 것을 알게된다.
따분한 농장생활에서의 일탈을 꿈꿨던 브리짓은 다음 날 그를 찾아가 핸드폰을 돌려받지만 '연하남이나 쫓아다니는 여자' 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
마침 학회를 위해 파리에 와있던 덴마크 출신의 치과의사 제스퍼와 마주치게 된 브리짓은 같이 산책을 하자는 제의를 받고 잠시 망설이지만 스탠에게 당한 모욕을 잊고 싶었던 것일까...그와 함께 산책을 즐긴다.
아내가 진료를 하기 위해 파리를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자베르는 그녀가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고 하필이면 제스퍼와 나란히 산책을 나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충격에 빠진 자베르!
그는 잠시 정신을 추스리기 위해 선물가게를 찾고 엽서를 산 후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가슴아픈 말로 상처를 주었던 아들에게 향한다. 그 곳에서 환상적인 곡예를 펼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자베르는 자신이 아들의 재능을 몰라봤다는 자괴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들을 꼭 안아주고 다시 노르망디의 농장으로 돌아와 농장을 돌봐주는 일꾼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젊은 시절 자신의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남편이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시들어가는 젊음과 새로울 것 없는 부부생활에 일탈을 꿈꿀 수 있다.
브리짓은 무뚝뚝한 남편에게 애교스럽게 잘 대응하면서 별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일탈이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구나 하룻밤의 사랑이라니..
점잖아 보이는 치과의사 제니퍼에게 오히려 유혹하는 듯한 행동도 당황스러웠다.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낸 브리짓은 미련없이 집으로 향한다. 뜨거웠던 그 밤 제니퍼가 브리짓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사해여행이 좋다은 조언을 담은 채.
우리보다 좀 더 개방된 문화를 가진 나라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신의 외도를 참아준 아내에게 빚을 갚은 느낌이었을까. 자베르는 아무 내색없이 브리짓을 맞는다.
돌아온 밤, 침대에 자베르가 없는 것을 느끼고 축사로 나간 브리짓은 우울증에 걸린 소를 돌보고 있는 자베르에게 소가 왜 이러느냐고 묻는다.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
"왜?"
"늘 같이 했던 소가 안보여서 그런게 아닐까"
"그 소는 돌아왔잖아"
"그런데 돌아왔다는 것이 두려운거야. 혹시 달라졌을까봐.."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를 빚대서 하는 대화가 마음에 훅 들어온다.
그리고 자베르는 아내를 위해 이스라엘의 사해여행을 예약한다. 신나게 짐을 싸던 브리짓은 여권을 찾기 위해 열었던 서랍에서 자신이 파리에 있었던 날짜가 찍힌 영수증과 엽서를 발견하고 남편 자베르가 자신의 일탈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오랫만에 이스라엘로 여행을 떠난 브리짓과 자베르....어느 누구도 파리의 일은 얘기하지 않는다.
사해의 물위에 몸을 맡긴 두 사람은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애잔하면서도 섬세한 프랑스 특유의 색이 담긴 영화이다.
자칫 무너져내릴 뻔한 가정이 묘하게 다시 봉합이 되면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그런 느낌.
우리나라 부부의 정서라면 가능한 일일까?
소녀적인 감성을 지니고 파리로 여행을 떠난 철부지 아줌마 브리짓의 연기가 참 좋았다.
길거리에서 불법 과일 행상을 하는 인도남자를 위해 경찰과 맞짱을 뜨는 장면도 좋았고 인도남자가 더 이상 노점에서 장사를 못한 채 카페를 전전하며 꽃을 파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브리짓의 슬픈 눈동자도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그를 자신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주선해준 브리짓의 마음은 참 아름답다.
그런 그녀이기에 남편의 일탈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쯤 느슨해진 부부들이 함께 보면 참 좋을 영화이다. 비가 내리는 이런 봄날 이라면 영화가 끝난 후 다정히 손을 잡고 와인바라도 틀림없이 찾고 싶게 만들 그런 영화.
때리고 부수고 자극적인 영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영화일텐데..아쉽게도 객석에는 온통 내 또래이거나 더 나이가 많은 아줌마들 뿐이다. 지들도 언젠가는 다 나이들어 갈텐데..미리 좀 연습해두는 것도 좋을텐데.
박스 오피스에 올라가지 못하고 짧은 기간 상영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영화이다.